•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 블로그

CL포커스

문화메신저

  • 쑤세미
  • 류명화
  • 남효선
  • 박장영
  • 유태근
  • 편해문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 권혁만
  • 김상현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 고성환(高性煥)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 강병철
  • 박원양
  • 김상현
  • 안경애
  • 정창식
  • 안경애
  • 김범선
  • 박월수
  • 김상진
  • 오공환
  • 안종화
  • 임은혜
  • 황구하
  • 엄원식

지난연재

  • 김종우
  • 최혜란
  • 남정순
  • 이효걸
  • 혼다 히사시(本多寿)
  • 장호철
  • 송성일
  • 이종암
  • 김만동
  • 남효선
  • 남정순
  • 강병두
  • 엄순정
  • 허지은
  • 엄순정
  • 장호철
  • 안상학
  • 류준화
  • 김현주
  • 이선아
  • 송성일

문화포커스

>CL포커스>문화포커스

  • 게시판 상단
    [울진지방 생활문화]사동마을 해월헌 종부에게 조선의 숨결 듣다.
    컬처라인 | 2018-10-08 프린트 퍼가기
  •  

     

    울진지방 생활문화

     

     

    사동마을 해월헌 종부에게 조선의 숨결 듣다 

     

    울진 영남사림의 배태지, 해월헌

     

     

    남효선

     

     

    울진군 기성면 사동마을은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자그마한 마을입니다. 해촌마을인 셈이지요. 학자들은 반농반어의 마을을 해촌으로, 어업만으로 살아가는 마을을 어촌으로 구분합니다. 울진 연안, 동해의 연안마을은 이 구분에 따르면 대부분이 해촌인 셈입니다.

     

    사동마을은 울진지방은 물론 이른바 전통 반촌(班村)으로 여겨지는 안동이나 봉화 등지에서도 알려질 만큼 이름이 나 있는 곳입니다.  

     

    해월헌(海月軒)과 이 고가의 주인이었던 해월 황여일(海月 黃汝一, 1556~1618)선생 때문입니다. 해월 황여일 선생은 조선조 선조 때의 이름난 문장가이자 유학자이며 대시인입니다. 흔히 국문학계에서 조선조의 3대 시인으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해월 황여일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중 오산 차천로와 해월 황여일은 외교문서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해월선생의 총기와 외교적 기량은 1599년(선조 32) 명나라 북경에 가서 신종황제와 가진 문답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당시 해월은 사헌부 장령으로 명나라 사신인 정응태의 무고 사건을 해명키 위해 명나라를 방문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인 1598년(선조 31) 7년 전쟁이 종전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명나라는 조선으로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를 사신으로 파견합니다. 그는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한다’고 명나라에 고변했고,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선조는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했습니다. 당시 정사(正使)는 백사 이항복이었으며 부사(副使)는 월사 이정구,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건너갔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유명한 관상가가 해월을 보고 단번에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눈치 챘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명나라 황제 신종이 해월에게 물었습니다.

    “조선은 고작 삼천리강토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 정기를 타고나서 명나라를 치려 하느냐?” 

    해월은 신종 황제 앞에서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저희 집 앞에는 만리창해가 있습니다.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고 그래서 중국 땅은 넘보지 않았습니다.”

    해월의 탁월한 외교적 수사에 탄복한 신종은 “조선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하며, ‘너 하나밖에 없다’는 뜻의 ‘여일’이라는 이름이 공연히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고 칭찬했습니다.

     

    해월과 동년(同年) 동월(同月)에 태어나 동갑나기로 해월과 각별했던 백사 이항복은 후일 자신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에 “신종의 오해를 푼 것은 해월의 공이었다.”며 당시의 해월의 활약상을 기록했습니다.

     

    해월헌기 시판

     

     

    해월헌은 황여일 선생의 별구(別構)입니다.

    당초에는 사동마을 마악산 기슭에 있었으나 해월 선생 사후에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습니다. 

    해월헌은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전면에는 누마루처럼 생긴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렀습니다. 198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됐습니다.

     

    해월헌이 눈길을 끄는 것은 건축물의 단아함에도 있지만, 당호인 해월헌 편액과 툇마루에 빼곡하게 걸려 있는 시 편액(詩 扁額) 때문입니다. 

    해월헌의 당호는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선생의 친필입니다. 

    아계 이산해 선생은 조선조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인으로, 문장이 매우 빼어나 ‘문장 8가(文章八家)’로 일컬어졌습니다. 

    해월헌의 편액과 건립 기문은 아계선생이 당파에 휩싸여 기성면 황보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썼습니다.

     

     

    해월헌 현판 

     

     

    해월헌을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기운은, 이곳이 울진지방에서 유일하게 영남사림학파의 학맥과 정신을 배태한 산실이라는 점입니다. 

    이 곳 해월헌과 해월헌의 주인인 황여일 선생을 모시는 명계서원을 중심으로 퇴계 이황을 기점으로하는 영남사림의 선비정신이 비로소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월헌에는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의 시를 비롯하여 오산 차천로, 백호 임제, 약포 정탁, 백사 이항복, 상촌 신흠 선생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시편이 오랜 역사의 부침을 간직한 채 빼곡하게 걸려있습니다. 이 중 차천로와 신흠, 이항복은 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낯익은 이름이어서 또 다른 감회를 자아내줍니다.

     

    해월헌을 이루고 있는 황여일 선생의 종택은 동해연안지방의 옛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ㅁ자 형’ 와가입니다. 

    흔히 이 같은 구조의 와가를 ‘뜰집’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사회에서 반가(班家)의 건축구조는 남성공간과 여성공간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흔히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해월선생 종택은 이 같은 전통양식의 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종택은 7칸 규모의 ㅁ 자형 정침과 별구인 해월헌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침은 중문을 중심으로 서편에 사랑채와 동편에 안방을 배치했습니다. 

    또 안방과 사랑방 사이에 대청마루를 놓았으며 중문으로 나가는 안마당에 ‘우물’을 배치했습니다. 지금은 현대식 상수도로 개조를 했지만, 집안에 우물을 배치한 것은 마을 공동우물을 사용하는 일반 민가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건축구조인 셈입니다. 

     

    옛것에 대한 관심이 천박한 상술과 부의 가치로 전락한지 오래여서, 이곳 해월헌도 수차례 도난사건이 발생했다 합니다.

    객지에서 오랫동안 공직에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와 쇠락하는 고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 황의석 할아버지는 “몇 차례 도둑이 들어 도저히 해월 할아버지의 유품을 관리할 수 없어 2004년도에 안동에 자리한 국학진흥원에 모든 유품을 기증했다.”며 흉흉한 세상의 인심을 전했습니다. 

     

     

     

    고가를 건사하며 생활하고 계신 종손 황의석 할아버지는 평해 황씨 2천년 세거지이자 영남 사림의 배태지인 이곳을 온전히 지켜 올 수 있었던 모든 공을 어머니께 돌리셨습니다. 방문 당시 황의석 할아버지와 함께 계시며 연신 미소로 화답해주셨던 그의 노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모는 해월종택의 13대 종부로 안동 고성(固城)이씨(李氏)가(家)에서 이곳 해월헌으로 출가한 이차야(李次也) 여사입니다. 이차야 여사는 바느질 솜씨가 곱고 글을 잘하기로 평해 지방을 넘어 영동에서는 으뜸으로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여사를 만나 뵈었을 때 그 분은 가을볕이 뜰 안 가득 내려 쪼이는 대청마루에 앉아 텃밭에서 손수 거둔 고춧가루를 갈무리하고 계셨었습니다. 당시 3년이 모자라는 100세의 노구임에도 안마루를 지키며 앉아 있는 기품에서 반가의 절도와 예절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한줌 흐트러짐이 없는, 넉넉하면서 단호한 선비가의 품세였습니다.

    조선의 질서를 지켜 온 자세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시 해월종택을 찾아 만나 뵌 고성이씨 종부의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고 기품 있는 자세를 잊을 수 없습니다.

    종부 이차야 여사는 지난 2012년 101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머리 조아려 빕니다. 

     

    울진 기성 사동마을에서 찍었습니다.

     

     

     

     

     

     

  • 남효선 글쓴이 : 남효선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
 
코멘트 영역
글에 대한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