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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이 있는 풍경]의성을 가다
    컬처라인 | 2019-03-26 프린트 퍼가기
  •  

     

    마을이 있는 풍경

     

     

    의성을 가다

     

    안계의 가을 들녘과 조성지를 찾아가는 길

     

     

    글 이미홍

     

     

      

     

    사방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걸 보고 가을산을 오르고 싶던 날 문득 의성의 안계들이 궁금했던 나는 가을산행을 조금 더 단풍이 익어 낙엽이 떨어진 날 가도 좋으리라 하고 뒤로 미루고 의성의 가을 들녘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안동에서 의성 읍내를 거치지 않고 곧장 길을 재촉해서 봉양장터에 들러 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주인장에게 안계의 너른 들과 저수지를 다 보려면 어느 쪽으로 길을 잡는 게 좋으냐고 물으니 조성지로 길을 잡아 나서면 가는 길목에 너른 들도 볼 수 있고 저수지도 볼 수 있을 거라고 귀띔을 해 준다.

    안계의 들을 만나러 가는 김에 경북지역 3.1운동의 시발지인 비안을 둘러보려고 봉양에서 안계방면으로 가다 비안교회 방향으로 길을 잡아 들어섰다. 비안 3.1 만세운동 기념공원이 비안교회 바로 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까닭이다.

    비안은 일제시대 이전까지 비안군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의성군 비안면이 되었다. 비안이 하나의 독립된 군이었다가 의성군에 병합된 지 정확히 5년 후인 1919년 3월 12일에 비안에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재미있는 역사 속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미년 비안면 쌍계리에서 3월 12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13일 비안시장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대사교회 만세운동으로 이어져 기도리, 하령리, 석탑리 등으로 확산되었다. 3월 18일에서 19일에는 안평주재소에서 도리원(현 봉양면)까지 진출하였으며 만세 운동은 4월 2일 춘산면에서 끝날 때까지 의성 전역으로 번져가며 전개되었다. 경북지역 그 시작점에 비안의 만세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기미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개천을 따라 산자락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시골길을 따라 가면 비안교회가 보이고 예전 안계초등학교 자리가 있던 학교 터 뒤 언덕에 3.1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있다.

    공원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비안시장 3.1만세에 참가한 열사들의 조각상과 기념탑이 우뚝한데 기념탑과 함께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기념탑 뒤에 새겨진 이름들과 그날의 기록이다. 큰 도로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위치해 비껴가기 쉬운 비안의 3.1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을 꼭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거창하게 3.1운동의 정신이나 애국심을 논하기 이전에 오랜 역사를 지닌 비안교회와 기념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비안들의 모습 또한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기 때문이다.

     

    기념탑 뒤로 기미년 3월의 비안장터 만세운동사가 벽면을 따라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설이 덧거친 날에야 노송의 의연함은 빛을 더하고 간당이 발호한 후라야 의열의 푸르름은 한층 돋보인다. 

    기미년 3월 12일 비안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경북지역에서 이어지는 3.1 만세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처음 시작은 비안공립학교의 우희원, 정인성, 박만녕이 박기근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논의, 4명의 주도하에 3월 11일 만세를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무산되고 3월 12일 비안공립학교 학생 180여명과 뒷산 옥단봉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우희원을 포함한 주동자 4명은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그들이 지핀 만세운동의 불씨는 비안공립학교 학생들과 비안현 주민들은 물론이고 의성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19년 3월 13일 장날을 기해 비안시장에서 학생들에 이어 농민들까지 가세하여 일제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거사를 준비하고 이날 모여 만세운동에 앞장선 이들은 기념탑 뒤에 새겨진 ‘기미 3.1독립만세 비안운동사’에 따르면 비안만 중심으로 놓고 보아도 우희원, 박만녕, 정인성, 박기근 이외에도 박준도, 임재호, 박홍섭, 김석근, 손동일, 김길도, 김성수, 조말동, 박말수, 신석이, 황돌이, 김성근 등 많은 이들이 있다. 이중 박홍서는 징역 11년, 박준도, 김재호, 김석근은 각각 징역 10년을 받았고 손동일, 김길도, 김성수는 징역 6년, 조말동은 징역 2년, 그리고 박말수, 신석이, 황돌이, 김성근, 김명강, 김삭불, 변용이, 김치산, 김성한, 박술이, 최성우, 홍석이, 배만조, 최용이, 김차이는 각각 태형 90대씩을 맞았다. 이는 비안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이들 중 일부일 뿐이다. 그날 비안장날 비안시장에서 같이 만세를 부른 사람들은 이 보다 훨씬 많았다. 나는 이 이름들 중에서도 조말동, 신석이, 황돌이, 김삭불 그런 이름들에 마음이 끌린다. 똑같이 만세운동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형을 받은 그 이름들이 말해주는 것은 똑같이 나라 잃은 설움에 일어났지만 이름 석 자를 미처 남기지도 못했던 수많은 우리네 민초들이 그때 함께 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의병장 김휘장군 충의비.

    임진왜란 때 전쟁의 요충지인 영남땅 상주 단밀에서 항전하다 전사한 비안 출신 김휘 의병장을 기리는 충의비.

    김희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의 단밀전투 장면이 아래에 그려져 있다.

     

     

    기념탑을 옆으로 돌아내려오다 보면 비안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단밀전투에서 전사한 김희 의병장의 충의비와 전투장면을 묘사한 충의도도 만날 수 있고, 임진왜란 때 비안에 머물면서 열 살의 나이로 비안현의 백성들에게 약탈을 자행하는 명나라 장수에게 맞서 부당함을 항의했던 두곡 박공(박사숙) 유허비와 순국지사 현호 박석홍 기념비도 있다. 비안들을 내려다보며 찬찬히 둘러보며 쉬었다 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갈 때는 검색해도 잘 안 나와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 했는데 내려올 때 보니 비안교회 뒤로 돌아 나오는 어엿한 길이 나 있었다. 만약 의성을 찾는 길에 이곳을 둘러볼 마음이 있다면 비안교회 표지석을 보고 찾아가야 길을 잃지 않을이 것다. 내친 김에 안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을 조금 돌아가기로 하고 비안교회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쭉 달려갔다. 비안에 와서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유서 깊은 공간 비안향교를 보기 위해서다.

     

    비안향교 광풍루

     

     

    비안향교는 유구한 세월 동안 비안현의 유생들이 머물며 수학한 곳으로 조선 초기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재건하여 1749년(영조 25) 현재 자리에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를 재건한 1610년을 기준으로 해도 벌써 오백년의 세월 동안 비안의 역사를 지켜온 공간이다.

    향교의 중심공간은 대개 명륜당과 대성전, 문묘이지만 비안향교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공간은 광풍루다. 명륜당과 대성전이 엄숙하고 진지한 공간이라면 내삼문을 대신하는 광풍루는 선비들이 시와 서와 경을 읊은 풍류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광풍루에 걸린 수많은 선비 가객들의 흔적이 아련한데 광풍루 누각 뒤로 드리워진 붉은 단풍과 어우러진 가을 광풍루는 그야말로 고색이 창연하다. 광풍루에 오르니 멀리 비안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칫 그냥 지나쳤으면 못 봤을 장면이다. 힘들어도 ‘정’ 자나 ‘루’ 자가 들어간 건축물은 올라가서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비안장터에서 울려 퍼졌을 그날의 만세 소리와 성현들의 공간을 뒤로 하고 의성의 가을 들판을 만나러 달려갔다.

    사람들이 왜 가을에 의성의 안계들에 가보라고 하는지 알고 싶었는데 한 굽이 돌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그 까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여기가 안계들이다, 여기는 무슨 들이다 구분 짓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온통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넉넉한 들판을 만날 때마다 멈추었다 가기를 되풀이했던 그날, 내가 만난 모든 들은 안계들이었다.

    실제로 안계면 지역을 중심으로 단북면, 다인면 등지의 형성된 들을 모두 일컬어 안계평야라고 한단다. 그리고 이 안계평야에서 나오는 ‘안계농협쌀’은 해외에서도 그 맛과 품질을 알아준다고 한다.

    너른 들이었다가 마을이었다가 굽이를 만나거나 고갯마루를 넘을 때면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를 반복하며 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저 이 들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것만으로도 가볼만한 의미가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은 안계들을 지나 큰길 따라 조금 가다가 왼쪽 마을을 끼고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의성의 저수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조성지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조성지로 들어가는 길

     

     

    조성지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마을 길가에는 주홍빛 감나무들이 이어지고 과수원에는 사과가 빨갛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나노라면 어느새 조성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조성지가 보이는 바로 앞 도로 건너편에 집이 두 채 있다. 차를 세우고 조성지 사진을 찍노라니 다인에서 농사짓다 낚시가 좋아 저수지 앞 빈 집을 사서 왔다는 아저씨가 길가 밭에서 일하다 말고 골골이 배추를 뽑아가라고 했다. 사양을 해도 거듭 권해 염치를 차려 배추를 먹을 만치만 골라 뽑고 언덕 위 뒷집 사는 박태휘 할아버지한테 조성지 만들던 당시 이야기도 들었다. 박태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고 14살 때 부친 따라 귀국을 했는데, 선조 때부터 치면 7대째 청산동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계유생 84살이야. 우리 동네 이름이 청산동인데 여기가 옛날부터 ‘찬물내기’라고 일 년 내내 찬물이 나와 물 좋다고 소문난 동네였어. 그러니 여기 못을 막았지. 6.25 지나고 정전(停戰)되기 전부터

    못 만드는 공사가 시작됐어. 해방되고 동네사람들하고 내하고 교회 기목사하고 동네일을 봤는데 못 만들 때도 동네사람들하고 같이 일했지. 일당 받고 돌 나르고 제방 둑 쌓고. 저수지 막을 때 안계들,

    위생들에 농수공급 하려고 만든다고 했어. 이 조성지 못물을 위생들에도 보내고 위수강으로 보내 안계들로도 보낸다고 하더라고.”

     

    조성지 못을 만들기 전에 청산동은 60여 호가 살았는데 물 좋고 가뭄이 들지 않아 살기가 좋았다고 한다. 못을 만들고 보니 옥토인 논밭과 7대조를 모시던 선산과 60여 호 집들이 물속에 다 잠기고 말았다.

    “저수지 공사를 오래 했어. 저수지 물 막는 데 한 4~5년 걸렸지. 당시에 안계 부자 셋이 조성지 공사를 맡아서 하다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갈수록 인부들 밥값이며 인건비며 천정부지로 들어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돈 되는 사업이라고 돈 벌려고 맡았다가 다 떨어 먹고 망했다고 그런 소리를 들었어. 이 못 막을 때 힘들었어. 그때 만들기는 잘 만들었지. 근데 시간 지나고 보니 위생들, 안계들 사람들이 좋지 우리 동네는 나아진 건 하나도 없어. 옛날에는 이리로 안계시장까지 청수동에서 똑바로 길이 나 있었어요. 걸어서 두 시간이면 안계시장 갔다 왔어. 그런데 못 생기고 나서는 시간이 두세 배 더 걸렸지. 사람들도 다 떠나고 빈 집만 남지았 뭐.”

     

    조성지

     

     

    조성지는 지난해 저수지의 물을 모두 빼내고 외래어종을 박멸하고 담수를 한 뒤 토종어종을 방류했다. 토종 어족자원을 보존하기위해 못 안에 집(수중가옥)을 두 채나 짓고 밤낮으로 물고기를 지킨다고 한다. 저수지 안에 관리초소가 실제로 두 곳이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기에는 말짱 헛짓거리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수지 물을 뺐을 때 상류쪽 지류로 올라갔던 배스 같은 외래어종들이 그 사이 조성지 안으로 다시 침범해 들어와 있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한번 터를 잡은 외래어종들을 몰아내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구나 싶어 속이 상하고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낚시도 못하고 참았는데 토종물고기 지키는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도 그 걱정이 된다.

    물고기 걱정을 하다가 조성지 주변으로 만들어 놓은 데크길을 따라 걸어나오는데 조성지 물빛이 가을단풍을 만나 같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진 찍기를 한사코 마다하고 84세의 나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휙 하며 금새 저만치 가버린 할아버지를 보내고 조성지를 되돌아서 나오는 길,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에 누런빛을 더해가며 안계들이 익어가고 있다.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글쓴이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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