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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종택]충효당(忠孝堂)
    컬처라인 | 2019-06-17 프린트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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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이야기

     

    충효당(忠孝堂)

     

    글 박장영

     

     

     

    종택이 있는 곳

    이 종택은 안동시내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예천방향으로 가다가 풍산읍에서 916번 지방도로 바꾸어 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하회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마을에 있다. 

     

    당호의 유래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물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이다. 서애 선생은 40여 년의 관직생활을 마치고, 고향 안동으로 낙향하였으나 거처할 변변한 집하나 없이 지내다가 풍산읍 서미리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셨다. 이에 선생의 손자인 졸재 류원지 공이 선생의 학덕과 업적을 숭모하기 위하여 유림과 제자들로부터 성력을 모아, 먼저 내당을 이룩하였고,증손인 눌재 류의하 공이 외당을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종택의 당호를 충효당이라고 한 것은 선생께서 평소에 자손들에게 강조하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씀을 받든 것이다. 선생은 임종 무렵 시를 한 수 지어 남겼는데 그 시구에서 조차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이 많은 것이 한스럽다고 자신을 낮추었으며, 자손들에게는 충과 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서애집에 실려 있는 시이다.

    林間一鳥啼不息     숲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門外丁丁聞伐木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一氣聚散亦偶然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只恨平生多愧怍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勉爾子孫須愼旃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 하라.

     

    忠孝之外無事業     충효 이외의 다른 일은 없는 것이니라.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충효당 건축물의 구성은 안채 27칸, 사랑채 12칸, 행랑채 12칸, 사당 6칸으로 총 57칸이다. 이 종택은 서향집으로 정면에 행랑채를 두고 그 안쪽으로 ㅁ자모양의 안채와 一자모양의 사랑채를 건축하였다.

    안채는 ㅁ자형으로 동북쪽에 2칸의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6칸의 안방, 4칸의 대청, 1칸 건넌방을 두었다. 건넌방은 며느리를 맞이한 시어머니가 안방을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옮겨와 거처 하는 곳이어서 연로하신 분의 안전을 생각해서 툇마루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시어머니가 살림권을 며느리에게 물려주면서 방까지 바꾸는 일을 안방물림이라 한다. 안방물림은 첫째는 가계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제사를 받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건넌방 앞에는 1칸 마루와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또, 부엌 앞에는 1칸의 부엌, 1칸의 찬방, 1칸의 고방, 1칸의 헛간이 있고 중문간 행랑채에는 1칸 방, 1칸 마루, 2칸 광, 1칸 대문, 1칸 헛간이 사랑채와 연속되어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 평면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과 대청, 방과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효당 현판이 걸려있는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12칸 겹집으로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다. 사랑채는 중앙에 4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편에 4칸 규모의 사랑방이 배치되어 있고, 오른편에 작은사랑 1칸과 퇴칸 반칸이 있고, 그 앞에 2칸 마루가 있다.

     

     

     

    솟을대문이 선 행랑채는 광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행랑채는 일반적인 종택 건물과 달리 12칸의 크기로 그 규모가 큰데 이는 서애 선생의 8대손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갑자기 닥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서둘러 지은 집이다.

    사당은 사랑채 동쪽의 따로 쌓은 담장 속에 건축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출입문은 삼문으로 중문과 좌ㆍ우협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 내부에는 불천위로 모시는 서애 선생의 신위와 비위와 4대조 신위와 비위가 벽감실에 모셔져 있고, 감실 앞에 제상이 놓여 있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이현(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厓)이다.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 공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 공의 차남으로 1542년(중종 37)에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퇴계 선생께서 "이 아이는 하늘이 내린 아이다."고 할 만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아호인 서쪽 언덕(西厓)은 하회마을의 서쪽 화천 건너 상봉정 아래가 바로 서애이다.

     

     

    1558년(명종 13)에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인 이경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이 해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1562년(명종 17)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 강명천리(講明錢魔)로 퇴계의 연원정맥(洞源正脈)이 되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의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566년(명종 21) 서애 선생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에 별시문과의 병과에 합격하여 외교문서를 맡아보는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학문을 토론하여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29세(선조 3)때에는 문인 최고의 명예인 일정기간 공직을 떠나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의 어명을 받았다. 

    1586년(선조 19)에 하회마을의 북안(北岸) 부용대의 동쪽에 옥연정사(玉淵精舍)를 지었다. 선생은 이 정자를 지을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탄홍(誕弘))이란 스님이 자청하여 10여 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한 것이다. 처음에는 옥연서당이라 이름하고 대청과 좌우에 방을 두었다. 

     

    1590년(선조 23)에는 3월에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정세를 살피게 하였으며, 5월에 명나라의 역사책에 조선왕조의 가계가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은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선조 24)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하고,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593년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고 되자 제소금을 증산시켜 전매제로 하여 군량미를 확보하였고 충주를 중심으로 한강 상류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조령에 관문과 둔전(屯田)을 마련할 것을 건의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선생의 나이 57세 되던 해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해 향리로 돌아왔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선조 37) 옥연정사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징비란 말은 '지난날을 경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의 소비(小毖)에서 따온 것이다. 

    이 해에 피난 시 왕을 호송한 공으로 호성공신을 하사 받았다. 서애 선생은 1607년(선조 40) 66세를 일기로 농환재에서 서세(逝世)하였다. 이후 1614년(광해군 6) 병산서원에 배향되었고, 1627년(인조 5)에 문충공(文忠)의 시호를 하사 받았다.

     

     

  • 박장영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전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콘텐츠연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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