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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 거니는 상주]왕산의 봄
    컬처라인 | 2019-09-09 프린트 퍼가기
  •  

     

    시로 거니는 상주

     

     

    왕산의 봄

     

     

    글 황구하

     

      모처럼 쾌청한 날입니다. 미세먼지로 뿌연 날의 연속이었는데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나니 눈도 맑고 바람도 달큼해졌습니다. 

      지난 1월 23일 아픈 남편에게 신장 공여를 하게 되어 수술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한겨울을 보내고 퇴원해 요양하다 보니 어느덧 봄이 이만큼 와서 사월도 막바지입니다. 그동안 몸무게가 많이 내려갔지만 아픔도 불편도 서서히 옅어지면서 입맛도 돌아왔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건강관리를 실천하며 몸을 돌보는 것인데요. 골고루 소식하는 소박한 밥상과 산책이 일상이 되어 하루하루 몸도 마음도 한결 가뿐해졌습니다.  

     

     

      장에 가서 봄나물도 좀 사고 볼일도 볼 겸 집을 나섰습니다. 상산초등학교 쪽 골목으로 접어들어 우체국부터 들렀습니다. 지인에게 미처 보내지 못한 시집 두 권 부치고 우체국 뒷길 ‘상주주조주식회사’로 갔습니다. 상주주조주식회사는 막걸리주조회사인데요. 1928년 설립되어 1985년 폐업했습니다. 하늘로 솟은 커다란 굴뚝에 ‘尙州酒造株式會社’라는 문구가 선명하지만 건물 한 채만 달랑 남았습니다. 그마저도 담쟁이 넝쿨이 낡은 몸채를 힘겹게 끌어안고 있는데요. 오래전 이 골목을 걷다가 마주친 이후 종종 찾아 안부를 묻곤 합니다. 상주시에서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도시재생사업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는데 ‘재개발’이 아닌 ‘재생’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봅니다.

     

     

      큰길 건너 왕산(王山) 뒤를 빙 둘러 걸었습니다. 왕산의 풀과 나무는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왕산은 해발 72m로 산이라고 하기엔 덩치가 좀 작고 낮지만 상주사람들에게 주는 상징적 의미는 높고도 큽니다. 왕산을 중심으로 돌로 쌓은 성(城)이 있었다는데요. 문화원골목 입구 ‘상주읍성(尙州邑城)’의 조형표지판 그림 성 품새를 머릿속으로 천천히 재보았습니다. 왕산은 일명 ‘장원봉’이라고 하지요.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어 붙여진 이름인데 『상주의 문화재』 자료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까지 문과급제자가 상주 사람 6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왕산은 상주 시내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이 둥글게 품은 알의 형상인데요. 일제강점기에는 왕산의 정기를 자른다고 봉우리를 깎아내려 신사(神社)를 세웠다고 합니다. 산 이름도 시내 중앙에 있다는 뜻으로 앙산(央山)이라 고치고요.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고 길을 끊고 지명까지 얼토당토않은 한자 표기로 바꾸는 등 정신까지 피를 말리는 일제의 만행과 뼈아픈 역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지요.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입니다.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전국적으로 메아리칠 때 상주에서도 1919년 3월 23일 젊은 학생들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이후 이안면 소암리, 화북면 장암리와 운흥리, 화서면 신봉리 등으로 퍼져 나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왕산 왼쪽 중턱에 ‘위암장지연선생기념비(韋庵張志淵先生記念碑)’가 세워져 있는데요. 상주 출생 장지연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하여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는 논설을 게재합니다. 이 일로 신문은 정간되고 그 또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지요. 경남일보 주필로 있을 때는 1910년 10월 11일자에 황현의 「절명시(絶命詩)」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버렸구나/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를 게재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신문을 압수했고 결국 1915년 1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 당하게 되는 필화사건의 원인이 되는데요. 그렇게 ‘붓’으로 비판하고 저항하며 “목 놓아 통곡”했던 그가 친일 경향의 글을 발표했었다는 논란이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절체절명의 벼랑 끝에서 “글 아는 사람”의 사회적 책무와 ‘글 하는 사람’으로서의 고뇌를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내가 상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왕산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주에 주부들 독서모임에서 출발한 ‘개여울문학회’가 있었습니다. 남편 직장선배의 부인 이해연 씨의 전화를 받고 같이 활동하게 되었는데요. 1993년 상주문화제 일환으로 백일장 행사가 열렸습니다. ‘개여울문학회’ 회원들도 거기 모두 참여하게 되었고요. 세 살 아들의 손을 잡고 좀 늦게 왕산에 도착했더니 당시 상주문인협회 사무국장 이창모 시인께서 “아이구, 아기가 같이 왔구나.” 반기며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바윗덩이가 툭툭 널브러져 있고 나뭇잎이 평평한 바닥을 이루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요. 

      그날 시제로 받은 ‘어느 날’은 신기하게도 금방 시가 되어 나왔습니다. 아이가 칭얼대지도 않고 얌전히 졸고 있어서 얼른 원고를 내고 집으로 왔는데요. 그날 저녁 생각지도 않게 장원으로 뽑혔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연락 받은 강산식당으로 가니 여러 선생님들이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때 박찬선 선생님의 “오랜만에 물건이 왔다.”는 말씀은 지금도 가끔 웃으며 회자됩니다. 당시 상주에 문학단체로는 상주문인협회가 유일했는데 등단의 절차를 밟았거나 상주문인협회에서 치르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게 되면 가입할 수 있었지요. 왕산 봉우리 한가운데 작은 표지석에 적힌 ‘장원봉’이라는 말의 인연이 새삼스럽습니다. 

     

     

      왕산 오른쪽 중턱 단칸 기와집에는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상주시 복룡동에 있던 것을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요. 보호각 안의 여래상 얼굴 이목구비와 목에 있는 세 개의 주름, 결가부좌한 발바닥이 또렷한데 머리와 어깨, 손, 하반신 일부는 파손되었습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19호인데 상처 입은 채 결가부좌한 여래상을 보니 병원에서 수술했을 때의 심정이 되어 긴급히 119 구조 요청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몸이 참 신비합니다. 남편은 수술하고 며칠 후부터 확연히 나아지기 시작했는데요. 건강을 회복하는 남편을 보면서 수술 전 무섭고 서러워 눈물 나던 시간이 고요히 가라앉았습니다. 극심한 통증도 지나가고 수술 부위의 흉터도 이제는 그저 잎맥을 물감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담담합니다. 가끔 남편에게 싱겁게 “나는 어디 있나요?” 묻습니다. 그러면 “이 안에 너 있다.”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배를 짚곤 하는데요. 한 고비 넘어와 우스갯소리도 하니 그저 감사한 일이지요. 불상 앞에 합장을 하고 새소리 울창한 400여 년 수령의 팽나무 그늘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왕산 아래 제일은행 네거리에서 삼강당약국과 옛 상주극장에 이르는 상주목 관아 터는 조선 시대까지 상주의 치소(治所)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민족을 수탈하는 기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통한의 과거와 지금 여기의 문제를 뼈저리게 상기하는 ‘상주 평화의 소녀상’이 2016년 10월 상주시민들의 정신으로 왕산 아래 세워졌는데요. 

      “이 문제를 우리가 살아서 해결 못하면 우리의 2세, 3세, 5세가 또 당해요.”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참혹함을 증언하며 「태워지는 처녀」를 그린 상주 곶감 집 딸 강일출 할머니 말씀은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뿐만 아니라 독도 영토 등 갈등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누군가 소녀상 목에 둘러준 스카프는 봄빛으로 따스한데 온전히 이 나라 이 땅을 딛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맨발은 여전히 시리고 춥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빈자리, 공감하고 함께하고자 만들어진 빈 의자에 참새 한 마리 잠시 앉더니 쪼르릉 날아갑니다. 상주 목민관 선정비 등의 비석군 뒤편에 어르신들이 앉아 계시고 연못 앞 정자 ‘풍영루(風詠樓)’도 바람을 읊고 있습니다. ‘왕산·상주의 시간을 말하다’ 시계탑 시곗바늘처럼 평온한 듯 그러나 결코 평온하지 않은 일상이 흘러갑니다. 

      구름이 끼고 눈비가 내리고 바람 찬 날 많아도 역사는 마땅히 옳은 길로 흘러야 합니다. 왕산도 봄봄, 쾌청하면 좋겠습니다.(♣)

     

     

     

  • 황구하 글쓴이 : 황구하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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