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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종택]진성이씨종택(眞城李氏宗宅)
    컬처라인 | 2019-12-16 프린트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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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이야기

     

    진성이씨종택(眞城李氏宗宅) 

     

    글 박장영

     

     

    ❙종택이 있는 곳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2.4km쯤 가면 안막동과 상아동을 잇는 청머리재가 나오며, 이 고개 마루에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중앙선 굴다리가 나온다. 이 굴다리를 통과하여 10m쯤 가면 좌측으로 난 갈림길이 나오며, 이 갈림길은 작은 개울을 끼고 북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 개울이 바로 역사의 전설을 간직한 가수천이다. 가수천을 따라 난 길을 약 5.4km쯤 가면 나지막한 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를 넘어가면 주하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진성이씨 종파가 600년 동안 세거해온 곳으로 사방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들 사이에 아주 좁은 들이 형성되어 있어 주촌(周村)으로 불렀으며, 그 후 이로촌(二老村)으로 고쳐 부르다가 오랜 세월동안 마을이 두루 평안하다고 하여 두루마을이라고 한다.

     

     

    ❙당호의 유래

    경류정은 진성이씨 대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원래 아랫마을 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종택 옆에 있다. 이 정자는 훈도 이연(李演, 1492~1561) 공이 창건했는데 재종숙인 퇴계 이황 선생이 ‘경류정(慶流事)’이라 편액하고, 또한, 시(詩) 한 수를 지어서 권면(勸勉)하였다. 이로서 경류정은 종택의 당호이자 이연 공의 호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황폐해지자 이연 공의 손자인 송간(松間) 이정회(李庭檜, 1542~1612) 공 등이 마을 안에다 옮겨 세웠으며, 근세 까지 이곳에서 서당을 열어 청년들에게 한학을 전수하였다.

     

    퇴계선생이 지어준 시는 다음과 같다.

     

    善積由來福慶滋  착하게 쌓여온 유래 복과 경사가 불어나고

    幾傳仁厚衍宗支  얼마나 어질고 후함을 전하여서 종파와 지파에 까지 퍼지나.

    勸君更勉持門戶  그대에게 권하노니 더욱 힘써 문호(門戶)를 도와서

    花樹韋家歲歲追  꽃나무에 쌓인 집 해마다 해마다 따르리라.

    山下高亭勢入冥  산 아래 높은 정자 형세가 하늘로 들어가고

    合宗筵席盡歡情  온 집안 대소가 잔치자리 기쁜 정을 다 하구나.

    更憐明月中秋夜  더욱 사랑하나니 밝은 달 한가위 날 밤에. 

    虛檻方池分外淸  빈 난간 네모난 연못 분수 밖에 맑구나.

    美酒高亭月正臨  좋은 술에 높은 정자 달은 막 떠오르고

    何須一斗百篇吟  무엇하러 술 한 말에 백 편의 시를 읊으리.

    小塘酒落如寒鏡  작은 연못 깨끗하여 차가운 거울 같고

    眞覺幽人善喩心  진실로 깨닫노니 그윽한 사람 마음을 잘 깨우쳐 주는구나.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진성이씨종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성이씨의 대종택으로 고려 말 문신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 공이 14세기 종택의 현 위치인 두루마을에 터를 잡아 노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7대손인 이훈(李壎, 1467~1538) 공에 의해 대대적으로 이건 중수하였다. 

     

    종택은 본채, 별당, 사당, 행랑채, 방앗간채, 내삼문으로 구성되며, 종택의 맨 앞쪽에 행랑채가 사랑 공간의 전방 조망에 장애가 되지 않게 우측으로 빗겨 배치되어 있고, 그 뒤쪽에 양측 날개채를 둔 완전口자형 본채가 자리 잡고 있다. 본채의 좌측에는 별당인 경류정이, 우측에는 방앗간채가 있고, 본채 뒤편 좌측 높은 곳에 내삼문 및 사당이 위치한다.

     

    이 종택은 성리학적 생활 규범에 따라 사랑채와 안채의 공간 영역 구분, 사당의 독립적 영역 구분 등 명확환 공간 구분이 17세기 이후 나타나는 배치 유형의 특징을 잘 나타나며, 별당 앞마당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14호인 수령 약 600년의 뚝향나무는 종택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봉선록(奉先錄)과 진성이씨세전유록(眞城李氏世傳遺錄) 등의 문서에서는 종택 건립과 관련된 여러 사실이 기술되어 있고, 특히 1929년 중수 과정을 기록한 가옥중수택일기(家屋重修擇日記)에 따르면 상량에 대한 전체 일정을 모든 가족들의 생년월일시를 참조하여 잡았다. 이 자료를 통하여 집을 건립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혼례․상례․제례문화를 볼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전승되고 있다. 

     

    따라서 진성이씨종택은 한 가문의 역사적인 변천, 향촌사회의 변화상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역사문화적인 자료가 전승되는 공간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본채는 정면이 9칸, 측면이 7칸 규모로 집의 평면이 ‘ㅁ자형을 이루면서 ‘ㅁ’자의 측면 외곽으로 마루와 방을 돌출시킨 날개집이다. 약 lm 50cm 높이로 기단을 쌓아 전면에 사랑채를 조성하고, 다시 lm 높이의 기단을 쌓아 안채를 건립하였다. 사랑채는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띄우고 툇마루를 낸 후 앞과 옆에 쪽마루를 놓은 다음 난간을 설치하였다. 툇마루의 뒤에는 2칸통의 마루방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2칸 통방을 꾸몄다. 특히 마루 우측 방의 좌측 칸과 직교하여 반칸 크기의 마루를 둠으로서 좌익사에 딸린 채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 처마에는 ‘고송류수각(古松流水閣)’이란 현판이 게판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전면에 반칸 크기의 퇴칸을 설치되어 있으며 안방을 중심으로 좌측에 대청, 우측에 부엌과 광을 배치하였다. 대청 앞의 좌익사에는 차례로 상방과 부엌을 두었으며, 부엌 앞에는 1칸 크기의 책방을 꾸며 선비들에게 가장 중요한 서책을 수납하게 하였다. 우익사에는 안마당으로 통하는 협문칸을 낸 후 1칸 크기의 광 2개를 차례로 배치하였다.

     

    별당인 경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기둥은 원주이며, 일부에 배홀림이 남아있다. 공간구성은 어칸과 좌측 협칸에 4칸 크기의 대청을 두고 우측 협칸에는 2칸통의 온돌방을 꾸민 간결한 구조로 건물의 전면과 우측면에 쪽마루를 달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대청에는 ‘경류정(慶流亭)’이라고 새긴 2개의 현판이 게판되어 있는데 대청 처마 아래에 것은 퇴계선생의 작품이다. 대청의 내부에는 전자로 쓴 편액과 퇴계선생의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경류정과 정침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불천위(不遷位) 이정 선생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一’자형 맞배지붕집으로 정침 앞 우측으로 약간 비켜나 있는데 좌로부터 각각 1칸 크기로 마구간, 광,방,마루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방앗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다.

     

     

    이 종택에는 천연기념물 제314호로 지정된 600여 년 된 뚝향나무가 있다. 조선 세종 때 선사부사를 지낸 이정(李禎) 공이 정주판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평북의 약산성 쌓기를 마치고, 향나무 세 그루를 가져와 한 그루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향나무와 비슷하지만 원줄기와 가지가 위로 자라지 않고 수평으로 퍼지는 것이 특징인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600년의 세월을 기둥에 두른 채 뻗어 나가는 나무를 보면 감탄사가 연이어 터진다. 

     

    가져온 향나무 세 그루 중 또 한 그루는 공의 셋째 아들인 판관 공 이계양(李繼陽)이 온혜 기지를 열 때 심었고, 나머지 한 그루는 외가 쪽 후손인 선산박씨 가(家)에 식수하였으나, 온혜 노송정(老松亭) 종택의 나무는 임인년 폭설에 동사하였고, 선산박씨 가에 있는 향나무는 임난(1592년) 때 왜병이 뿌리를 잘라버렸다고 노송기(老松記)에 기록되어 있다. 

     

    ❙관련인물

     이자수(李子脩, 생몰 미상)

    이자수 공은 고려 말의 현리로 생몰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공은 1330년(충숙왕 17년) 명서업(明書業)에 급제하고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통헌대부판전의사사(通憲大夫判典儀寺事)에 이르렀다.

     

    송안군의 아버지이자 진성이씨 시조인 이석(李碩) 공은 진보(眞寶) 고을의 현리로 사마시에 붙어 현리의 신분을 면하고 나서도 성품이 공손하여 관아에서 부는 각성(신호 나팔소리)이 들리면 마루 아래에 엎드렸다가 각성이 그치면 마루로 올라오곤 했는데, 현감이 그것을 알고 미안하게 여겨 각성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옮겨 살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영양지방의 청기현(靑杞縣)에 이사하여 살다가 송안군 대에서 왜구를 피하여 안동부(安東府)의 서마라촌(현재의 풍산읍 마애리)으로 이거하였다. 송안군은 만년에 가장(家庄)과 전토(田土)를 두고 지금의 두루로 옮겼다고 한다. 타계한 후에는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작산사(鵲山祠)에 제향 되었다.

     

     이연(李演, 1492~1561)

    별당인 경류정을 지은 이연 공은 조선 중기대의 인물로 자는 호연(法然) 으로 현감을 지냈던 우양(遇陽)의 증손으로 호군(護軍) 훈(增)의 아들이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아 풍류장자(風流長者)의 풍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덕과 의성에서 훈도를 지냈다.

     

     이정(李禎, 생몰 미상)

    공은 송안군 손(孫)이고,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을 지낸 이운후(李云候)의 아들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나 민첩하고 용감하여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남보다 뛰어났다. 세종 조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변경을 침입하였으므로 이 때 조정에서는 영변진(寧邊鎭)과 약산성(藥山城)을 구축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제압하기로 하였는데 그 때 공이 판관(判官)으로서 이 어렵고 힘든 역사를 감독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다시 최윤덕을 따라 북적정벌(北秋征伐)에 공이 있어 작위를 하사 받았으며, 한산과 선산부사를 역임하여 치적을 남겼다.

     

    후에 손자 이우(李偶)의 귀(貴)로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증직 받았고, 증손 이황(李滉)의 귀로 인하여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가증되었다. 안동김씨 지보주(知南州) 김정(金挺)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이우양(李遇陽)은 인동현감,이흥양(李興陽)은 훈련참군,이계양(李繼陽)은 진사이다.

     

     

    ❙진성이씨 시조묘소 전설 

    퇴계선생의 5대조께서 진보현에 아전으로 있을 때, 풍수에 아주 밝은 원님이 오셨다. 새로 부임한 현감은 아전을 대동하고 이곳저곳 고을 산천을 둘러보다가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감람골의 지세를 눈여겨보고 현청으로 돌아왔다. 

     

    현감은 아전에게󰡒달걀을 가지고 가서 아까 우리가 간 그 봉우리 위에 묻고 자시까지 기다려 병아리가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고 하였다. 아전은 현감이 지시하는 대로 했더니 정말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전은 이 현감이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인 걸 알고, 그 자리가 천하에 명당임을 간파하고 탐이 났다. 다른 생각을 품은 아전은 병아리를 없애고, 병아리로 부화하지 못하는 곤달걀을 묻고 현청으로 돌아와서 현감에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다음날 현감은 그 곳을 찾아 곤달걀을 파내어 보면서󰡐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 데....,󰡑하며 고개를 젓고 현청으로 돌아가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현감은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갔고, 아전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었다. 훗날 아전이 부친상을 당하자 괴나리봇짐을 꾸려 예전의 그 현감을 찾아 한양으로 갔다. 아전은 그 현감에게 부친상을 당했는데 마땅히 모실 곳이 없는데 전에 현감님과 함께 가서 달걀을 묻었던 곳이 양지바르고 좋은 것 같아 부친을 모시고 싶다고 고했다. 

     

    그러자 현감은 그 자리가 달걀이 병아리로 부화하지 못했으니 명당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아전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전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진보로 돌아와 그 산 그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삼우제를 마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해 산소에 도착한 아전과 상주들은 깜짝 놀랐다. 봉분이 갈라져 있고 관이 당 위로 솟아 있었다. 그래서 급히 다시 묻어도 자꾸만 관이 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아전은 괴나리봇짐을 꾸려 다시 한양으로 가서 현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 모든 사실을 고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현감은 󰡒그러면 그렇지! 그곳은 천하 명당이거늘, 이런 낭패가 있나.󰡓하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명당의 주인은 따로 있는 것인지,

     

    현감은 아전에게 자기가 입었던 헌 관복을 내어주며 󰡒그 터는 대인이 묻힐 명당이다.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서 묻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전은 백배 감사하고 진보로 돌아와 그 관복을 입혀 부친의 장례를 치루니 신기하게도 아무런 탈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진보에서는 행세하기 어렵다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안동으로 이거하였다. 명당의 음덕인지는 몰라도 당대에 발복을 받아 본인은 안사공신 송안군이 되었고, 6대만에 퇴계선생 같은 훌륭한 대학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 박장영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전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콘텐츠연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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