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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종택]정재종택(定齋宗宅)
    컬처라인 | 2020-06-29 프린트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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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이야기

     

    정재종택(定齋宗宅)

     

    글 박장영

     

     

     

    ❙ 종택이 있는 곳

    정재종택(定齋宗宅)은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면으로 안동대학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지나 20km 정도 가면 수곡마을로 가는 수곡교와 동안동농협주유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더 가면 정재종택 표지판이 나오는데 그 앞에서 좌회전하면 종택이 보인다. 

    이 종택은 원래 임동면 대평리(한들)에 있었고, 만우정은 임하면 사의리에 있었는데, 1987년에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정재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에 이건하였다. 

     

     

    ❙ 정재종택 가계

    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 공의 후손으로, 6세손 인의공(引義公)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한양에서 박승장의 사위가 되어 처가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다.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삼아 안동 입향조가 된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우잠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류승현은 박실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은 한들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류승현의 아들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과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그리고 수정재(壽靜齋) 류정문(柳鼎文) 3대가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됨으로써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류관현 이후의 세계는 류통원(柳通源), 류성휴(柳星休), 류회문(柳晦文),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진다. 

     

     

    ❙ 당호의 유래

    정재(定齋)는 류치명(柳致明, 1777∼1861) 선생의 아호이자 당호이다. 종택 내부에는 정재 선생의 자찬(自撰)인 명당실소설(名堂室小說) 현판이 게판돼 있다.

     

    名堂室小說     

    物各止其所而天下定矣

    止於仁敬而君臣定止於

    孝慈而父子定止於信而 

    朋友定比聖人所以一天

    下之動也子思曰君子素

    其位行不願乎其外素其

     

    位止也不願乎外則定矣

     

    故曰君子居易以俟命定

     

    之謂也故名吾齋曰定齋

    定則止矣而止之有其道

    曰君子反求證其身故人

    名吾室曰反求庵

    사물이 각기 자기 자리에 그쳐 있어야 천하가 안정된다.

    인(仁)과 경(敬)에 그쳐 있어야 군신의 관계가 안정되고,

    효(孝)와 자(慈)에 그쳐 있어야 부자의 관계가 안정되며,

    신(信)에 그쳐 있어야 붕우의 관계가 안정된다. 

    이것은 성인이 천하의 동(動)을 한결같이 한 까닭이다. 

    자사(子思)가 이르되,  ‘군자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행  하고,

    그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재 자기 위치에 있다는 것은 그침이다.

    그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으면 안정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한 일을 하면서 천명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정(定)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의 서재를 정재(定齋)라 칭하였다.

    정(定)은 곧 그침[止]이다. 그침에 도가 있으니,

    ‘군자는 돌이켜 자기 몸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또 나의 방을 ‘반구암’(反求庵)이라 명칭 하였다.”


         

     

    ❙ 건물의 구조와 배치

    정재종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종택으로 증조부인 류관현 공이 1735(영조 11)년에 세운 집이다. 종택은 정침, 대문채,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口자형 평면으로 전면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사랑방,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이 있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안방, 부엌, 찬방, 대청, 누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2칸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그리고 종택과 조금 떨어진 곳에 정재 선생의 정자인 만우정(晩憂亭)도 있고, 종택 뒤에는 정재 선생의 묘소도 있다. 

     

     

    ❙ 정재 불천위 제사

    선생이 별세하자 유림에서 900여명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애도했다고 하고, 선생의 제자는 급문록(及門錄)에 기록된 문인만 6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세영언(家世零言)에 따르면 선생은 계묘년 9월 25일 본가 길사(吉祀) 시 도유(道儒), 향유(鄕儒), 문친(門親) 600여명이 모인 도회석상에서 불천위로 결정하여 봉사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즉 선생의 불천위는 1963년도에 결정되었다. 선생의 6세인 류성호 현 종손이 중학교 3학년 때 길사 당시 타 성씨만 1천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선생의 불천위 제사 기일은 음력 10월 6일이고,  김씨 부인은 1월 2일, 신씨 부인은 1월 10일이다.

     

     

     

    ❙ 가양주 송화주

    가양주는 각각의 집안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술을 빚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의 접대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 마다 모두 가양주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승되는 가양주는 그리 많지 않다. 전주 류씨 가문의 가양주로 대대로 빚어온 안동송화주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화주는 제사 때 제주로 쓰였고, 귀한 손님 접대 때도 쓰였다. 언제부터 빚어 먹었는지 알기 어려우나 정재 선생 때에 이미 제사 술로 써왔다고 하니 그 역사가 200년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밑술을 바탕으로 덧술을 빚고 용수를 받아 걸러내는 송화주는 알콜도수가 15°∼ 18°내외의 맑은 갈색을 띠는 술이다. 솔잎과 누른국화, 금은화(金銀花) 등을 사용하여 재료가 풍기는 향이 매우 독특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가양주는 김영한 종부가 별세한 이숙경 시어머니로부터 가양주 빚는 법을 전수 받아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빚어 제주(祭酒)와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영한 종부는 송화주가 정재종택을 지은 양파공 때부터 빚어 왔을 수도 있다고 한다. 

     

     

    ❙ 관련인물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년∼1861년)

    선생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성백(誠伯)이며 호는 정재(定齋)이다. 이상정(李象靖) 공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한평(寒坪) 류회문(柳晦文)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간암(艮巖) 이완(李埦)의 딸이다. 외가인 안동부 소호(蘇湖,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출생하여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 류범휴(柳範休), 정종로(鄭宗魯), 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장시도사(全羅道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되었고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楚山府使), 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853년(철종 4) 가선대부에 오르고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같은 해 풀려났다. 1856년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857년 문생들과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이듬해 85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정재문집(定齋文集)』·『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학기장구(學記章句)』·『상변통고(常變通攷)』·『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사진. 정재종택

     

    ❙ 전하는 이야기

    이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가세영언(家世零言)』이 있다. 여기에 이 집안의 소소한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양파 류관현의 부친 류봉시(柳奉時) 공 이야기

    류봉시 공이 한 번은 처가에 가다가 의성에서 주무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떤 장사꾼의 말이 주인집의 술밥을 모두 먹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말 주인인 장사꾼은 돈이 없어 그 값을 치르지 못하여 말을 빼앗겼고, 그 때문에 가던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류봉시 공은 딱히 여겼으나 길을 지체 할 수 없어 그대로 처가로 향했다. 길을 나선지 한참 후에, 하인이 “사실 그 술밥은 우리 말이 먹었는데 소인이 우리 말의 입을 닦고, 장사꾼의 말에 밥풀을 칠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며 일의 전말을 전했다. 그러자 류봉시 공은 “네가 어찌 우리 말이 먹은 것을 속여 남에게 손해를 입히느냐!” 하며 하인을 크게 꾸짖고, 묵었던 숙소로 되돌아가서 그 값을 치렀다. 

    한편, 류봉시 공의 부인 신씨는 오봉 선생 종손녀이다. 어느 날 근친을 가셨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시어른인 진사 공께서 신씨 부인을 보고 “네가 친정에서 올 때 돈 가지고 온 것 있거든 하인에게 행자를 좀 주어라.”고 하시었다. 그러자 신씨 부인은 “돈과 쌀을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죽게 된 걸인을 만나 돈을 주었고, 또 오다가 어떤 여자가 길에서 해산을 함으로 쌀을 주고 왔기에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시니 진사 공께서 크게 탄복하셨다고 한다. 

     

    2) 양파 류관현(柳觀鉉) 공 이야기

    양파 공께서 나라의 부름을 받아 역마를 타고 풍악을 잡히고 집을 떠나시다가 갑자기 말을 돌려 집으로 되돌아오셨다. 집에 돌아오신 공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궁이의 재를 모두 져내시고, 밖에서 흙을 가져와 부엌 바닥 마다 깔더니 다시 말을 타고 한양으로 떠났다. 서리(조선시대의 하급 품외 관원)가 몹시 궁금하여 연유를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릴 때부터 매일 흙을 파다가 부엌에 깔고, 그 이튿날 끌어내고 다시 까는 것이 일과인데 오늘은 내가 벼슬길을 떠난다고 마음이 잠시 해이해져서 잊은 것이다.”고 하셨다. 다시 서리가 “그러면 나리께서 출타 하시면 어떻게 하시나이까?” 하니 “내가 집에 없으면 밥을 아니 먹으니 관계없다.”고 하셨다. 

     

    3) 기봉 류복기(柳復起) 공이 장가드는 이야기

    기봉 류복기 공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천전리 외가에서 성장하셨다. 공이 장가를 가실 때 외삼촌이신 학봉 선생이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보교를 내리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 때 어떤 노인이 다가오더니 “신랑은 참 좋다마는…” 하면서 지나갔다. 학봉 선생은 이상하다 싶어 그 노인을 불러 “왜 그런 말을 하시오?”라고 묻자, 그 노인은 “신부가 귀먹은 벙어리에다 사지병신이다.”라고 하였다. 

    학봉 선생은 크게 놀라 “부모도 없는 생질을 그런데 장가보낼 수가 없으니 돌아가는 것이 옳다.” 고 하시자 기봉 공은 “부부지도는 천하의 대륜이라. 비록 성례는 하지 아니하였으나 혼례가 이미 반수가 이루어졌으니 지금 돌아가면 그 신부는 망문과부(望門寡婦)가 될 것이요, 또 저 노인이 말한바와 같다면 더욱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내가 장가를 아니 가면, 그 신부는 이 세상에서 영영 버려지는 것이니 제가 장가를 가는 것이 옳지요. 염려 말고 가던 길로 가시지요.” 라고 하였다. 

    그래서 길을 재촉하여 신부 집에 도착해 보니 그 노인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사실 그것은 그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이간질하여 혼사를 방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 박장영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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