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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이 있는 풍경]왕실 자녀의 수복(壽福) 염원이 담긴 예천지역 `태실(胎室)` [Ⅰ]
    컬처라인 | 2020-10-19 프린트 퍼가기
  •  

     

    이야기가 있는 문화탐방

     

    왕실 자녀의 수복(壽福) 염원이 담긴 예천지역 `태실(胎室)` [Ⅰ]

     

    글. 황지해(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사도세자 태실

     

    태(胎)가 좋은 땅을 만나면 태의 주인이 오래 살고, 지혜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 왕실에서는 태의 처리를 의례로써 각별하게 다루었고, 그 결과물은 태항아리, 태실, 태지석, 태실비로 현존하고 있다. 고려 강종대왕(康宗大王, 1152년) 태실 1곳을 비롯하여 조선의 문종대왕(文宗大王, 1414), 폐비윤씨(廢妃尹氏, 1455), 장조대왕(莊祖大王: 사도세자, 1735),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 오미봉(五美峰) 무명(無名) 태실 등 무려 여섯 곳의 태실을 보유한 예천. 고려왕실과 조선왕실, 그리고 예천의 지역사를 태(胎)가 이어주고 있다.  

     

    문종대왕 태실(2016)

     

    문종대왕 태실비 (1930년대)

     

     

     

    한국인이 ‘태(胎)’에 부여한 특별한 의미

    아기가 태어난 지 1년이 지나야 비로소 1살이 부여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국인은 태아(胎兒)가 엄마의 자궁에서 성장하는 10개월을 1년으로 환산한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1살이 되는 이유이다. 이는 태아를 인격체로 인정해 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데서 기인했다. 임신 3개월부터 출산 때까지 태교를 행하는 것, 출생지를 물을 때 흔히 ‘태생(胎生)’이 어디인지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인의 이와 같은 문화적 관념은 태(胎: 태반과 그에 연결된 탯줄)를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태아가 생물학적 인간의 형상을 갖추는 10개월 동안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여 태아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태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선왕실 자녀들의 태는 정교하고 복잡한 의례과정을 거쳐 독특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태 주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태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 조선시대의 사회적 관념은 음양학(陰陽學)자 정앙(鄭秧)의 말에 잘 집약되어 있다. 

     

    “당나라 일행(一行)이 저술한『六安胎』의 법에 말하기를,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胎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에 관계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 데 도수(度數)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좋은 상서(祥瑞)를 얻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에 길지를 가려서 태를 잘 묻어 수(壽)와 복(福)을 기르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74권, 세종 18년(1436) 8월 8일 / 일부>

     

     

    폐비윤씨 태실비

     

    왕실에서 왕비의 출산은 정비는 산실청(産室廳), 후궁은 호산청(護産廳)에서 이루어졌다.  왕실 자녀가 태어나면 태를 즉시 항아리에 넣어 산실 내의 길한 방향에 둔다. 그리고 3일이 지난 후 7일 안에 세태일(洗胎日)을 정하여 홀기에 따라 세태의식을 치른다. 의녀가 월덕방수(月德方水)와 향온주(香醞酒)로 태를 100번 정성들여 깨끗이 씻은 후 태내항아리에 넣는다. 태내항아리 맨 아래 가운데에는 엽전과 금박 또는 은박 조각을 깐 후 씻은 태를 내항아리에 넣었다. 이를 기름종이와 남색의 비단 보자기로  외항아리에 다시 넣고 내항아리와 외항아리 사이에는 솜을 넣어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태의 주인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적고, 담당관원의 성명을 적어 다시 산실 좋은 방위(吉方)에 잘 갈무리해 둔다. 이와 같이 세태의식을 치른 후 정성스레 모셔두었던 태는 *육안태법(六安胎法)에 의거하여 정해진 시기에 태실에 묻는다. 가능하면 왕의 딸의 경우에는 탄생 후 3개월째 되는 달에, 왕의 아들의 경우에는 5개월째 되는 달에 태를 묻도록 하였다. 

     

    *육안태법(六安胎法) : 태장경(胎藏經)에 기록된 것으로, 당나라 현종대 고승인 일행선사(一行禪師)가 고안한 태 처리 방식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태를 처리하는 시기에 특히 영향을 주었다.

     

    문효세자 태실비

     

     

    조선왕실 태실의 등급 

    세태의식에 이어 왕실 자녀의 태를 안치할 태실을 조성하기 위한 장소인 태봉(胎峰)을 선택한다. 태봉의 태실에 태를 묻어 보관하는 것을 안태(安胎), 또는 장태(藏胎)라고 하는데, 조선왕실에서는 장태법에 따라 왕실 자녀들의 태를 좋은 땅에 가려서 묻었다. 특히 왕이나 원자, 원손과 같이 왕위를 계승할 자손의 경우,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가 그 태에 달려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태를 묻을 ‘좋은 땅’ 찾는 일에 특별한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다. 

     

    태봉은 무덤과 같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음택에 해당하지만,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덤과 다르다. 태봉을 선정하기 위해 담당부서인 관상감(觀象監)에서 평소에 담당관원을 보내어 태봉으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후 1등지, 2등지, 3등지로 등급을 나누어 태봉등록(胎峰謄錄)이라는 책에 기록하여 두었다. 태실후보지는 왕실 자녀의 왕위계승 여부와 적서여부에 따라 3등급을 나뉘었다. 원자와 원손과 같은 왕위계승자는 1등 태봉, 왕비소생인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후궁소생인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으로 구분하였다. 이처럼 장태지에 대한 등급화는 태의 주인공이 국가적으로 또는 왕실 내에서 어떠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태봉등록(胎峰謄錄)에 의하면 태실을 중심으로 왕은 300보, 대군․공주는 200보, 왕자는 100보로 하여 사방에 금표를 설치하였다. 금표구역 내에서 경작과 벌채는 금지되었고, 금표지역 밖에는 산불의 연소를 막기 위해 그 지대 나무를 모두 태워 버려 금표지역을 둘러싼 잡풀지대를 설정했다. 이것으로 인해 민폐가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태실의 병폐를 축소하고자 태실의 영역에 들어간 토지를 보상해 주거나 금표지역을 원봉(圓峰) 한 구역에 그치게 하고 경작지를 확대시켜 준다거나 나무와 풀 뜯는 것만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문종대왕 태실

     

    1등급 명당에 조성된 예천지역의 태실

    태봉을 정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 긴 시간이 요구되었다. 왕실 자녀들의 태가 묻히게 될 태봉이 실제 정결한 곳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예천군 용문사 대장전 바로 뒷 봉우리에 위치한 문효세자 태실도 최종 선정에 이르기까지 확인 과정을 거쳤다. 문효세자는 정조 6년(1782년)에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정조의 맏아들로 원자이다. 정조 8년(178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실의 바람과는 달리 애석하게도 정조 10년(1786년) 홍역으로 인해 세상을 등졌다.『정조실록』에 따르면 원자의 태를 궐 밖의 1등 태실로 정하고자 하였고, 1783년(정조 7) 원자의 태봉을 예천으로 정하게 된다.

     문효세자의 태봉으로 선정된 예천 용문사 뒤 태실 조성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기 위해 파견된 상지관(相地官) 이명구(李命求)는 문효세자의 태를 봉안해 둘 장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예천 용문사 뒤 태봉을 치표해 둔 자좌 오향의 터를 간심하니, 태백산에서 소백산이 되고, 소백산에서 용문산이 되는데, 주산이 수려하고 굳세며, 국세가 완전하고 단단하며, 봉혈이 단아하고 반듯하며, 두 물줄기가 합하니, 바로 장수를 누리고 총명하실 길지로 태봉을 하기에 적합하였습니다.”

    <국역 안태등록(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명봉사

     

    그리고 실제 태실을 조성할 장소를 상세히 살려본 결과, 자좌(子坐) 오향(午向)은 왼쪽으로 치우쳐서 가장 길한 임좌(壬坐) 병향(丙向)으로 바꾸도록 하였고, 태봉의 형상을 그려서 정조에게 보고한 후 윤허를 받아서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실이 취할 수 있는 명당의 조건으로 첫째, 들판 가운데 위치한 둥근 봉우리와 같은 지형, 둘째, 산 정상에 주산(主山)의 능선과 연결되는 내맥(來脈)이 없어야 하며, 좌우의 용호(龍虎)를 마주볼 수 있는 지형, 셋째,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는 공중을 받치는 듯 하는 형세의 지형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예천의 태실을 살펴보면, 아직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강종대왕 태실을 제외한 나머지 5곳의 태실은 둘째와 셋째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오미봉 태실은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예천지역 태실에 조성된 태주 중에서 왕으로 등극하거나 추증된 왕은 고려시대 강종과 조선시대 문종, 장조(사도세자)이며, 왕으로 등극된 이후 다시 만들어진 가봉태실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였던 폐비윤씨를 포함한 3곳이 있다. 

     

    즉 예천의 태실은 폐비윤씨 태실과 무명 태실을 제외하고 안치된 태주(胎主)가 모두 원자이다. 이에 태실지로서 가장 좋은 1등급의 명당에 조성된 것이다. 예천지역의 6개 태실은 금당실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잘 알려져 있듯 이곳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가『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한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다음호에서 계속)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글쓴이 : 컬처라인 문화메신저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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