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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종택]노송정 종택(老松亭 宗宅)
    컬처라인 | 2020-11-16 프린트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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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이야기

     

    노송정 종택(老松亭 宗宅)

     

    글. 박장영

    사진. 노송정 종택 종손 이창건, 종부 최정숙

     

     

    ❙ 종택이 있는 곳

    노송정 종택은 안동에서 청량산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30km 정도 가면 도산면 온혜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에 있다. 온혜리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중마라고 부른다. 국도 왼편에 퇴계 선생의 숙부인 송재 선생 신도비와 온혜초등학교가 있고, 온혜초등학교를 지나면 노송정 종택을 만날 수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태실이라고도 불리던 이 종택은 2018년 11월 1일 자로 경상북도민속문화재에서 국가민속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명칭은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이다. 

     

    ❙ 당호의 유래

    이 종택은 1454년에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 이계양(老松亭 李繼陽) 선생이 세웠는데 후에 몸채의 중앙 돌출된 방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 하여 ‘퇴계태실’이라고도 부른다. 이계양 선생은 아호를 당호로 삼았다. 

     

    정침의 동쪽에 一자형 평면의 정자인 노송정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자 앞에 당호로 부르게 된 노송(뚝향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유래를 기록한 노송기(老松記)에 세종조에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李禎) 공이 정주판관으로 재직 시 북쪽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해 평북도 영변진 설치와 약산성 증축의 대역사를 감독하여 공적을 남기고 귀향길에 약산의 향송을 3주 옮겨와 심었다. 한 그루는 본가인 경류정, 또 한 그루는 공의 셋째 아들인 판관공(이계양)이 온혜로 입촌할 때, 나머지 한 그루는 외가 쪽 후손인 선산 박씨가에 심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세 그루의 나무 중 온혜 노송정의 나무는 임인년 폭설로 동사하였고, 현재 나무는 약 80년 전에 경류정의 뚝향나무에서 가지를 취목하여 옮겨 심은 것이다. 또한 선산 박씨가의 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뿌리를 잘라 죽였기에 현재는 진성이씨 경류정 종택의 나무만이 전한다. 

     

     

     

    ❙ 건물의 구조와 배치

    노송정 종택의 평면구성은 ㅁ 자형의 정침과 노송정 및 사당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림문(聖臨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정침이 자리 잡고 있고, 정침의 오른편에 노송정과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림문의 편액이 걸려 있는 행랑채는 대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규모이고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왼편 2칸은 광과 방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고, 오른편은 방 1칸과 2칸통의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으로 된 대문에는 퇴계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부인이 “공자가 대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고 하여 공자와 같이 훌륭한 성인이 들어온 곳이라는 뜻으로 성림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연유가 기록되어 있는 '성림문중수기’와 ‘성림문’ 편액이 걸려 있다.

     

    팔작지붕에 흩처마로 이루어져 있는 몸채는 ㅁ자형의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 ㅁ자형의 평면인 경우에는 몸채의 안마당 공간이 정방형의 마당을 이루고 있으나 이 집의 경우에는 안마당 공간에 정침으로부터 돌출된 태실이 마련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몸채는 사방 7칸 규모이다. 정면 7칸은 가운데 중문을 내고 좌우에 3칸씩 배치되어 있다. 죽담은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상당히 높은 규모이다. 

     

    중문을 중심으로 오른편은 사랑채 공간이다. 사랑채는 2칸통의 사랑방과 1칸의 대청으로 공간을 나누었고 앞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돌렸다. 대청은 몸채의 우측면 작은 사랑방과 연결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의 대청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중문의 왼편으로는 판벽으로 된 봉당이 1칸 이고,그 옆으로 방 1칸, 마루 1칸이 분할되어 있으며 앞쪽으로 난간이 없는 툇마루를 놓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 공간으로 이어진다.

     

     

    평면도(옛문화 답사회 자료 인용)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공간으로 연결되는데 왼편에 1칸 규모의 봉당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특색이 있는 것으로 중문을 열었을 경우에 안채가 훤히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외벽으로 막았기 때문에 봉당을 거쳐야만 안채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특히 안채의 안마당 공간에 돌출된 퇴계태실이 자리 잡고 있어 외부의 방문자들이 안채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막혀있다. 

     

    내외벽은 중문을 마주하며 판벽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집에 설치된 내외벽은 전체가 막힌 구조를 하고 있으나 이 집의 경우에는 벽 전체를 막은 형태가 아니고 상부는 개방되어 있다. 이렇게 열린 공간으로 퇴계선생이 태어났다고 하는 태실이 돌출되어 안마당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태실 누마루에 걸려있는 ‘退溪先生胎室(퇴계선생태실)’이라 적혀있는 편액이 잘 보이도록 되어 있어 방문자들이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하였다.

     

    태실은 누각형의 건물로 사방 1칸 크기인 방과 앞으로 반 칸 크기의 마루와 좌우측면에 쪽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돌렸다. 방은 정침으로부터 연결되는 곳에 출입문인 여닫이문을 달고 나머지 3면은 쌍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이중으로 내어 방안이 언제나 환하게 밝혀지도록 하였다. 태실 앞쪽으로 반 칸 규모의 누마루를 내었고 천장은 일반 집에서 잘 볼 수 없는 우물천장을 돌려 격조를 높였다.

     

    정침은 왼쪽에서부터 2칸의 부엌,2칸의 안방, 2칸의 대청과 1칸의 건넌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부엌은 서쪽 측면의 찬방과 연결되는 1칸과 안마당에서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 1칸으로 2칸통이다. 부엌 위로는 안방에서 올라갈 수 있는 다락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안방은 정면 2칸통이고 측면 1칸 규모이다. 정면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설치하여 태실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은 2칸의 규모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뒷벽에는 바라지창을 달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청 건너편에 상방을 낸 구조인데 몸채의 우측면으로 2칸통의 규모이다. 몸채의 우측면에는 가운데에 문을 내고 왼쪽으로는 작은 사랑방과 연결되고 오른쪽으로는 상방과 연결된다.

     

    몸채의 동쪽에 一자형 평면의 노송정이 자리 잡고 있다. 노송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왼쪽에 2칸통의 방을 내고 방의 앞쪽에 1칸 크기의 마루를 내어 전체평면의 구조는 ‘ㄱ’자를 눕혀놓은 구조이다. 노송정 당호가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자연석쌓기의 기단에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에 오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청은 전체 6칸의 규모로 제사를 받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 대청과 방을 구분 짓는 곳에는 4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문을 열고 들어 올릴 수 있는 구조를 하였다. 우측면과 뒷벽에는 하방과 중방 사이에는 바라지창을 달고 중방과 상방 사이는 흙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에는 노송정(老松亭), 해동추로(海東鄒魯), 온계서족운(溫溪敍族韻), 산남락민(山南格間)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노송정의 동쪽에 위치한 사당은 외문으로 된 문과 낮은 흙담장으로 구획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인 사당이 있다. 사당 건물은 맞배지붕에 풍판을 설치하고 홑처마이다. 기단은 다듬돌을 사용하여 바른충쌓기로 낮게 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북쪽으로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감실을 놓고 위패를 모셨으며 감실 앞에 제상이 있다. 정면 3칸에는 궁판이 있는 띠살문을 내고 앞에 반 칸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 관련인물

    이계양(李繼陽,1424〜1488)

    공의 자는 달보(達父)이며 호는 노송정이며 본관은 진성이다. 입향조인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 공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군기시정(軍器寺正) 이운후(李云侯)이고, 아버지는 선산부사 이정(李禎)이다. 어머니는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김정(金挺)의 딸이다. 또한 공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할아버지이다. 

     

    묘갈명에 의하면 '공은 수양이 높고 효성이 두터웠으며 세상의 일에 초연히 소요하니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고 하였다. 11506년(중종 1) 아들 이우(李堣)가 중종반정에 끼친 공로로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고, 청해군(淸海君)에 봉군되면서 보조공신 이조참판 진성군에 추증되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모습이 빼어나 부모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다. 젊어서 백숙조(伯叔祖) 이중위(李仲位)에게서 양육되었는데, 이중위의 집안은 부호(富豪)하였으나 훈회(訓誨)를 가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스스로 분발하여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하여 1453년(단종 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벼슬하지 않고 향리로 물러나 살다가 1488년(성종 19년) 5월 모일에 병으로 집에서 졸하였다. 장지를 가리지 말라고 유명하여 이에 집 북쪽 2리 되는 수개곡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공의 명을 따른 것이다. 

     

    공은 부사직 김유용(金有庸)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이식(李埴)은 젊어서 힘써 배워 여러 차례 향시에 장원하였고, 모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일찍 졸하였다. 다음 이우는 1492년(성종 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 문과에 급제하여 내한(內翰)에 보직되고, 간원(諫院)ㆍ이부(吏部)ㆍ병부(兵部)의 낭관(郎官)·동부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 입향 이야기

    노송정 종택은 퇴계선생의 조부이신 증이조판서 이계양공이 자리 잡은 곳이며 노송정공은 단종을 폐위시키려던 계유정난 때 초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이 곳 온혜에 터를 잡았다. 

    공은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있는 은거명당인 경북 봉화에서 훈도(訓導)를 지내며 소일했다. 어느 날 안동으로 오다가 온혜를 지나면서 이곳 시냇가의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곳곳을 구경하다 피곤을 느낀 공은 신라재를 넘다가 잠시 쉬고 있었다. 맑은 공기에 흠뻑 빠져 있는데, 우연히 노승 한분이 쓰러져 계신 것을 발견하고는 정성을 다해 구호했다. 원기를 회복한 스님은 온혜의 아름다움을 극찬했고, 공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두 사람은 다시 온혜로 되돌아왔고, 스님은 여기저기를 한참 살피더니 지금의 노송정 종택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여기에 터를 정해 살면 귀한 자손을 둘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이곳에 종택을 지을 때에 온혜에는 한 집만 살고 있었고, 주위에 묵은 땅이 많아 농사지을 농토가 넉넉했다. 또한 물을 끌어다 논을 만들 수 있었으며 나무숲이 울창하고 골짜기가 깊어 항상 맑은 냇물이 흐르고 물고기도 많았다고 한다.

     

    공은 이곳에 세거지를 마련하고 이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었다.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이름을 각각 식埴과 우堣라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이 형제가 지방 향리에 불과한 진성 이씨를 굴지의 명문으로 발돋움하게 할 줄을. 식은 아들을 잘 낳았고, 우는 그 자신이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이런 결과는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교육으로써 집을 일으키고자 한 노송정의 결실이기도 했다. 퇴계가 쓴 노송정의 사적(事跡)을 보면 “敎子孫爲業 有終焉之志(자손 교육을 업으로 하며 세상을 마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고 했다. 노송정은 두 아들의 공부를 격려하기 위해 “차가운 절간에서 고생스러이 공부하는 너희를 생각하니 보고 싶은 마음이 때로 눈앞에 어린다, 70세를 바라보는 부모는 날마다 너희들의 입신양명을 고대한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자손들은 결국 그런 부모의 염원에 부응했다.

     

    진성 이씨의 시조 이석은 진보(現 경상북도 청송)에 살았고, 아들 이자수가 조선 초기 안동 마애로 입향하여 지내다가 다시 와룡 두루로 간다. 시조의 증손인 이정공의 세 아들이 태어나서 풍산, 와룡, 도산으로 분가했다. 도산 온혜에 온 분은 이계양으로, 퇴계에게는 조부가 된다. 이로부터 진성 이씨 온혜파가 그 뿌리를 내렸다. 

     

     

     

     

  • 박장영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전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콘텐츠연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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