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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 거니는 상주]아리랑 고개다 집을 짓고
    컬처라인 | 2021-02-08 프린트 퍼가기
  •  

     

    시로 거니는 상주

     

     

    아리랑 고개다 집을 짓고

     

     

    글 황구하

     

     

      “친구야, 상주 나갈 일이 있는데 내가 살던 화산 좀 가보려고. 아리랑고개 주위 걸어서 한 바퀴 돌아보자.”

      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이승은 소설가의 문자가 파르르 날아들었습니다. 상주아리랑고개는 상주 시내에서 사벌로 가는 길목, 경북선 기차가 지나가는 고갯길입니다. 양쪽에 나지막한 산이 있고 화산 근처까지 이어집니다. 상주아리랑고개 마을은 북천에서 건너다보거나 사벌 오갈 때 옆구리를 스치기만 했지 동네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적은 없습니다. 친구가 어릴 적 살았다는 화산도 마찬가지지요.

     

    왕버드나무

     

      아침 햇빛이 안개를 둘둘 말아 올릴 무렵 집 앞에서 친구를 만나 북천으로 갔습니다. 왕버드나무 두 그루가 낮은 몸으로 백여 년의 가을을 지켜내고 있었는데요. 북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 위로 올라섰을 때 ‘계산1동 氷庫마을’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빙고’라는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옛날 북천에서는 은어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잡은 은어는 임금께 진상되기도 했다는데요. 은어를 저장하던 얼음 창고가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빙고마을’은 ‘얼음 창고 아래’라 하여 지금도 ‘빙고밑’, ‘평구밑’이라고 불리지요. 

     

      철도 굴다리를 지나 벚나무 길로 들었습니다. 비탈길 아래 수로에는 붉은 여뀌와 고마리가 무더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마을 집들은 길 아래 안온하게 모여 있는데요. 바쁜 철이기도 하고 코로나19 시절 탓인지 마을 사람들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린 채 낯선 이의 방문을 지켜볼 뿐 가을 아침의 마을은 고요했습니다.

     

    계단길

     

      어느 집 담장 아래 참취나물 작은 꽃무리가 환했습니다. 장작더미가 쟁여져 있고 곶감을 만드느라 감 타래가 치렁거리기도 했지요. 부추와 파가 자라고 있는 밭은 이 계절에도 초록이 맹렬했습니다. 막다른 골목 옆, 위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니 조릿대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숨겨놓은 공간처럼 풍경이 그럴싸했습니다. 그곳을 통과하면 언덕바지 어디쯤 빙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옹달샘처럼 물이 고여 있는 걸 하나의 증표로 추측을 해본다고 합니다. 조릿대 터널 끝 작지만 탁 트인 밭에 들깨 향이 그윽했습니다. 거기서 상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조릿대 터널

     

      조릿대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바로 옆집 사시는 할머니가 나와 계셨습니다. 인사를 하니 또 친구 분이 나오셨습니다. 우연찮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할머니께서 좀 편찮으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 분이 걱정 돼서 오셨다는데 할머니는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뒤이어 따님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내가 우리 친구가 마음 아플까봐 이런 소리를 안 할라켔는데. 그만 그질로부터 이래여. 내가 그랬거든요. 나는 사십 대에 우리 신랑이 죽었다. 그래도 아저씨는 팔십 대까지 안 살았나. 그렁께 많이 살았고 괜찮다. 친구야, 괜찮다 했는데 본인이 뭐 자려고 누우만 자꾸 이래이래 따님이 와 가이고 엄마, 엄마 한대여. 그래서 니가 마음이 약해 몸이 쇠약해져서 그런 거니까 우예든지 뭘 먹고, 자꾸 기운을 차리고, 이제 힘을 내야 된다. 지금 그카고 이야기하는 중이라요.”

     

      두 분 할머니는 고향이 같은 어릴 적 친구인데 이 마을로 시집을 오게 돼 더없이 끈끈한 사이라 했습니다. 할머니께서 뭘 잘 드시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우리 친구는 얼른 간식으로 챙겨온 사과와 두유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제 아는 언니가 있어요. 그 언니는 애가 셋인데 중간 애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요 앞에 인빈간 고 다리 있는 데서요. 길 건너 과자가게 간다고 가다가, 고 다섯 살짜리 애가 그렇게… 그 애 일이 힘들었는지 애기 아빠도 그만 무슨 병에 걸렸어요. 그때 그 언니는 뱃속에 또 애기가 있었는데, 그 애기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남편이 죽은 거예요. 그 언니가 자식 잃고 남편 잃고… 지금은 애들 다 컸어요. 다 컸는데 또 어떤 일이 있는 줄 알아요? 딸 하나를 또 잃었어요. 결혼해서 애기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어르신, 힘드시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 언니도, 그래도 살아요. 그냥 지금, 그렇게 살아요.”

     

      그만 “아이구” 한숨이 나왔습니다. 할머니도 그렇고 친구 얘기도 그렇고 먹먹했습니다. 할머니 친구 분은 “아이구, 그렁께. 몸이라도 건강하만 돼여. 내 살이라도 떼서 우리 친구한테 줄 수 있으면 좋겠어.” 하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할머니는 간신히 사과와 두유 몇 모금을 드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할머니들께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산다는 게 굽이굽이 아리랑고개 같습니다.

     

       아리랑 고개다 집을 짓고

       동모야 오기만 기다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요

     

       <매일신보>(1930. 5. 23)와 『언문조선구전민요선집』(1933), 『조선문학전집 상』(1936), 『조선민요집성』(1948)에 올라 있다는 「상주아리랑」 한 소절을 읊조리며 햇살 쨍한 오르막길을 올랐습니다. ‘아리랑’은 ‘아리다’, ‘쓰리랑’은 ‘쓰리다’라는 말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요. ‘아리랑’은 이미 우리 삶의 원형이 아닐는지요.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위안이 되는 “동모야 오기만 기다”리고 동무가 지치고 힘들면 내가 위안이 되어 “동모야 오기만 기다”리는 심정이 뜨겁습니다. 지금 여기 ‘동모’가 있어 좋습니다.  

     

    아리랑고개

     

      좁고 가파른 골목의 집들은 빛과 그늘이 반반씩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오르막 끝 빈집이 그림처럼 보이는데요. 동학농민군들이 묻혔다는 산도 건너편으로 보였습니다. 1894년 상주 농민군은 함창, 예천 등의 농민군과 상주읍성을 점거하는데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 의해 백여 명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제대로 장례가 치러질 리 만무하지요. 달구지에 실린 시신은 상주읍성 북문으로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 설움과 애달픔이 오죽할까요. 녹슬어 삭아가는 대문과 낡은 벽이 아리랑 쓰리랑 소리를 내는 듯했습니다.

     

    화산길 철로

     

      철도 교차로에서 친구는 철로를 따라 걷자고 했습니다. 경북선 기차 운행 시간을 보니 마침 빈 시간이었지요. 거친 자갈길에 연결된 침목 하나하나가 인생의 희로애락 건반 같았습니다. 그렇게 제각각의 음색으로 하루하루 흘러가는 것이 인생길 아니겠는지요. 철로 옆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흐드러지고 철로까지 손을 뻗은 호박 덩굴이 아슬아슬했습니다.

     

      친구가 어릴 적 살았다는 화산에 들어서니 화천정(花泉亭)이라는 정자가 보였습니다. ‘꽃샘’이라는 말이 참 예뻤는데요. “어머나, 여기에 정자를 세웠네? 아이구 세상에, 우물을 막았네.”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정색을 했습니다. 정자 아래 마을 우물이 있는데요. 무슨 연유인지 정자를 우물 위로 세워 정자의 바닥이 우물을 덮어버린 모양새가 되었지요. 그 우물가 바로 옆에 있는 집에서 어린 시절 친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한겨울에도 우물물이 따뜻해서 동네 사람들이 배추와 무 등 김장거리를 씻었다고 하는데요. 채소를 씻는 물 아래서는 세수도 하고 빨래를 했다고 합니다.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 친구의 우물가 이야기는 정감과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화산은 꽃 화(花)를 쓰지만 불 화(火)를 쓰기도 한다는데요. 불은 열기니 땅이 뜨겁다는 거지요. 한겨울에도 물이 따뜻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상주시민운동장 뒤편으로 돌아 철도 교차로로 다시 왔습니다. 이곳에 주막촌이 있었다는데요. 사벌과 예천, 안동 사람들이 상주 장을 보러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합니다. 도깨비가 나왔다거나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요.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 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는 백석 시인의 시 「주막」 이 생각났습니다. 장꾼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소반에 차려진 술병과 작은 사기그릇들의 정경이 그려졌지요. 

     

      아쉬운 것은 이곳에 있던 대장간이 사라진 겁니다. 한평생 호미, 낫 등을 만들던 ‘북문농기구’ 대장장이 홍영두 어르신 돌아가시고 대장간 있던 자리에 말쑥한 새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점점 뒤안길로 밀려나는 우리 농업의 현실이 거기 있었지요.    

     

     

    표지석

     

      한 숨 크게 돌리고 나서 큰길을 건넜습니다. 길 한쪽 ‘상주아리랑고개’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요. 표지석 뒤편에 새겨진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상주읍성 북문 밖 화지산은 품에 북망산을 둔데다 빗기(北溪) 뒤쪽에는 돌림병 전쟁 천재지변 등으로 비명횡사한 고혼을 제사하던 여단(厲壇)이 조선 초부터 있었다. 상주목사 주재로 성황당에서 발고제(發告祭)를 치른 사흘째 본제를 지내었으나 아리랑고개 일대는 혼(魂)길도 공존하여 역대의 원혼 속에는 임진4월 북천전망 장사나 갑오 9월 상주읍성 전몰 동학군의 원혼도 함께 넘나들었던 고갯길이었다.

     

      철마조차 같이 넘는 이 고개는 1960년대까지도 즐비했던 주막에서 산 자가 죽은 자의 넋까지 달래었기에 골은 얕으나 한(恨)은 깊고 길은 짧으나 원(願)은 길었던 상주아리랑고개로 그 이름을 지켜왔던 곳이다. 여기 한 덩이 돌을 놓아 표석을 삼음도 힘겨운 삶의 무게를 아리랑고개 두어 덜어낼 줄 알았던 선인들의 옛길이 모습을 달리한 오늘의 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싶음에서이다.

    ―「상주아리랑고개」 부분

      

    권태을 선생 원고와 김봉기 판화

     

      ‘상주아리랑고개’ 표지석 문안은 권태을 선생께서 쓰셨습니다. ‘상주아리랑고개’의 역사적 둘레와 깊이를 잘 알 수 있는 내용인데요. 얼마 전 권태을 선생의 「상주아리랑고개」 친필 원고 복사본을 판화가 김봉기 선생한테서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눈물 같은 「아리랑고개에 산제비꽃 피고」 판화 한 점까지 덤으로 받았지요. 

     

      “골은 얕으나 한(恨)은 깊고 길은 짧으나 원(願)은 길었던” 상주아리랑고개는 과거 역사이면서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아무 데도 없지만 언제나 있는 사람의 무늬입니다. 눈물과 웃음, 좌절과 희망, 한과 해원, 차안과 피안의 교차로입니다. “아리랑 고개다 집을 짓고” “오늘의 길”을 넘고 넘어 저 너머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널목이지요. 

     

      북천의 갈대와 억새가 아련한 날, ‘동모야’ 손을 잡고 또 한 굽이 아리랑고개를 넘었습니다.

     

     

     

  • 황구하 글쓴이 : 황구하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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