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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를 걸으며]노마드의 땅 키르기스스탄
    컬처라인 | 2021-04-05 프린트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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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있는 문화탐방

     

    노마드의 땅 키르기스스탄

     

    글. 류명화

      

    최근 여행의 갈증은 세계테마여행을 재탕 삼탕하고도 해소되지 않아 낯선 트레커의 카메라를 따라 Road Trip에 묻어가기에 이르렀다. 3시간도 좋고 7시간도 좋고 강릉에서 부산까지 동해 일주는 물론이고 미국, 호주, 독일 내키는 대로 선택해서 따라가면 된다.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언택트시대에 로드 트립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콘텐츠인 것 같다. 이렇게 역마살이 돋는 날이면 모니터 속으로라도 떠나야하니 어쩌면 내 몸속 어딘가에 노마드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태어난 곳에서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야하는 유목민의 비애.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새로운 영토를 찾아 수많은 전쟁을 치러가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역사. 끝없는 초원에 어린 목동이 바람처럼 말을 타고 달리며 양떼를 모는 광경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노마드의 땅 키르기스스탄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서 키르기스스탄을 가려면 아직은 직항 노선이 없어 카자흐스탄 공화국 알마티공항을 경유해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Bishkek)로 가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알마티에서 비슈케크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정도 소요며 이동하는 동안은 흰 설산과 사막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까지 중앙아시아의 멋진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그 광경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엄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앙아시아는 톈산산맥을 중심으로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공화국과 같은 -스탄 국가들이 자리해 있다. 국가 명에 붙은 이 '-스탄(stan)'이라는 말이 '땅'이나 '영토'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가축을 몰고 신선한 풀을 찾아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족들의 나라로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했으나 아직도 이념갈등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파미르고원과 톈산에 가로막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 돼 개발이 늦을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기도 하다.

     

     

    국토의 90%가 고산지대며 톈산의 만년설과 고도에 따라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속살 키르기스스탄은 어떤 면에서 보면 대한민국 내륙의 오지 봉화와 참 많이 닮았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청정한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닮았다. 키르기스스탄이 고대 동서양의 대상들이 비단과 종이, 화약, 도자기, 차를 싣고 교역하던 실크로드의 거점지 역할을 했던 것처럼 봉화도 한 때는 동해의 소금과 어물, 내륙의 우수한 농우를 교역했던 보부상길의 거점지 역할을 했었던 곳이다. 이렇듯 사람이 사는 곳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닮게 마련인가보다.

     

     

    그 옛날 먹고 살기위해 목숨을 걸고 걸었던 애환의 길, 지금은 성지순례자들과 역사·생태학자들 그리고 새로운 체험과 자연경관을 보려고 세계 각국의 젊은 트레커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어쩌면 신 실크로드 시대가 도래한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나 젊은 트레커들은 톈산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좋아하고 며칠씩 야영을 하기 때문에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도 아무렇지 않게 고산을 오르내렸다. 

    이들 반열에 낄 수는 없으나 나 또한 아라쿨 패스(Ala-Kul Pass) 트레킹을 목적으로 방문한 까닭에 만반의 준비를 해 부한카(буханка)를 타고 아라콜을 향해 이동했다. 구소련시절 험한 산악지대로 군인 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오프로드 승합차인 부한카는 생긴 모양도 재미있지만 덜컹거릴 때마다 아찔한 즐거움을 주며 험한 산길을 잘 달리기 때문에 요즘은 트레커들을 운송하는데 주로 쓰이고 있다. 

     

     

    아라콜패스가 시작되는 협곡은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과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을 걷다보면 이곳을 왜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고 하는지를 절로 느낄 수 있게 된다.

     

    협곡과 숲을 온종일 걸어 도착한 알틴아라샨(Altyn Arashan)은 ‘황금빛 온천’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그곳 산장 아래로는 빙하가 녹아 흐르는 넓은 계곡을 끼고 두 개의 노천 온천이 있었다. 40도 정도의 온천수는 미네랄이 풍부해 피부병과 관절염에 좋다고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특별한 효능이 아니더라도 산행으로 지친 피로를 풀기에는 더없이 좋은 온천이었다. 시설은 빈약했지만 깨끗한 온천수가 쉼 없이 솟아올랐고 대충 판자로 지은 온천탕 창밖으로 아름다운 계곡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알틴아라샨에는 두 개의 산장이 있었는데 우리가 묵은 산장의 주인은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양 한 마리를 잡았다. 산행으로 허기진 저녁식탁에는 이스트와 소금만 넣고 만든 ‘란’이라는 빵 외엔 모두가 양고기요리였다. 쇠꼬챙이에 양고기를 꽂아서 구운 사슬릭, 뼈가 쏙쏙 빠지도록 잘 삶은 양갈비요리, 감자와 토마토를 넣은 스프에도 양고기는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초원을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 있어 손님은 ‘신이 보내준 선물’로 극진히 대접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양 한 마리를 잡아줄 줄은 몰랐다.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먹을까 걱정도 됐는데 금세 다 먹어버렸다.

     

     

    군더더기 없는 그들의 삶처럼 그들의 밥상 또한 요란한 양념도 복잡한 조리법 없이 재료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음식들이었다. 잡냄새 없고 담백한 양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던 웃지 못 할 경험도 있었다. 산행으로 인한 피로를 해소해준 온천과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웠던 그들의 대접 덕에 그 날의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남았다. 초원의 알싸한 야생화 향과 물소리, 바람소리, 손에 닿을 것처럼 맑고 초롱초롱한 별들이 눈앞에 다시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다음날 아침 알틴아라샨을 출발해 다음 야영지로 가는 길, 4시간 쯤 지나고 부터는 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가 없는 툰드라지대로 지형이 바뀌었고 질척질척한 진흙이 들러붙어 힘겨운 발걸음을 더 무겁게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아침 7시에 출발해 정오가 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지쳐가고 있었고 행동식으로 점심을 먹고 나니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이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피할 곳 없어 흠뻑 젖은 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고도가 더 높아지면서부터 비는 눈으로 바뀌었고 바람까지 거칠게 불었다. 야크들은 무리를 지어 거칠고 혹독한 고산의 눈보라로부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체온은 점점 떨어지고 손발이 시리다 못해 저려오기 시작했고, 여기다 고소증까지 더해 속까지 울렁거리더니 이내 구토를 동반했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이 거칠고 잔혹한 대자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었다. 빙하가 흘러 움푹 파진 구덩이에 야크 한 마리가 죽어 있었고 그 주검 위로 흰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날마다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 서봐야 살아 있음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숨 쉬는 그 자체로도 감사한 일임을 깨닫게 되고 또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힘겨운 한걸음 한걸음을 옮겨 무사히 고도 3,600m 야영지에 도착했다. 가이드와 그의 일행은 미리 도착해 유르트(yurt)에 불을 피우고 누룽지를 끓여 권했지만 고소증 때문에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가지고 온 마른 옷을 죄다 껴 입고도 모자라 오리털 침낭 안에 들어가 사시나무 떨듯이 한참을 떨었다. 동토의 냉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던 유르트에서의 그 밤은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다.

     

    그렇게 힘겨운 밤을 보내고 맞은 아침은 신기하리만큼 맑고 화창했다. 야영을 했던 3,600m에서 산정호수가 있는 아라쿨까지 가는 동안도 날씨만큼이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어서 정상인 3,900m에서도 고소증은 없었다. 에메랄드빛 산정호수와 만년설 덮힌 아라쿨은 기대 이상 아름다웠고 저마다 선명한 빛깔을 뽐내며 핀 야생화들은 알프스와는 또 다른 멋을 지니고 있었다. 

     

     

     

    하산 길은 너덜지대가 많아 위험했으나 그 구간을 지나면서부터는 거대한 폭포와 울창한 숲 그리고 그 안에 핀 야생화들이 만발해 세상에 이보다 더 멋진 곳이 또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야생화 군락지를 지날 때 짙은 더덕 향에 끌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 더덕이 자생하고 있었다. 가이드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산 더덕은 최고의 약초로 치며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했더니 “우리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그런 거 먹지 않아요. 그건 소나 말들이 먹는 거지 사람이 먹는 게 아니에요.”라고 한다. 우리에겐 귀한 식재료이자 약재인 더덕을 보고 사람이 먹는 게 아니라 하니 얼마나 웃기던지, 세상은 이렇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놀랍고 흥미로웠다.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편견을 바꾼다고 했던 프랑스 작가의 말처럼 나라마다 새롭게 접하게 되는 문화에 편견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덕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아라쿨 패스를 걷는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고 또 많은 것을 느끼며 점점 키르기스스탄이 내 안에 깊이 차고 들었다. 만년설을 두른 이식쿨(Issyk Kul) 호수에서 수영도 해보고 콕투스의 끝도 없는 꽃길만 4시간동안 걸어보는 경험도 하며 여행을 마무리할 때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키르기스스탄이곳이 내 전생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트레킹 일정을 모두 마치고 비슈케크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짜리몽땅하고 두루뭉술하게 생긴 한 아주머니가 화장실 사용료로 낼 동전을 바꾸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가리켜 “까레이얀?” 하며 물어 왔다. 상황이 그런지라 나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친절하게 5솜짜리 동전을 건네주며 자기도 고려인이라고 소개했다.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 표현했고 포옹까지 해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말 젖을 발효시켜 경단처럼 만든 구루트(курут)도 한 봉지 사주며 연신 손을 잡으려 하는 그녀에게서 잃어버렸던 동생을 찾은 언니의 눈빛 같은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1930년대 구소련시절 스탈린은 일본의 간첩 행위를 막기 위해 러시아 극동지역의 고려인 20만명을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그 이주된 고려인들이 우리가 흔히 아는 까레이얀, 고려인이다. 말이 이주지 달리는 열차에 무작위로 던져진 고려인들 가운데 2만5천명은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원에 구덩이를 파 집을 짓고, 풀을 뜯어 먹고,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겨우 살아남았다. 그들은 억척같이 일해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많은 소수민족들 가운데서도 고려인 2세, 3세들이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강인하게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이였던 그녀가 나를 반겨주고 다독여주니 나는 그들의 사연에 대한 애잔함과 더불어 이 여행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참으로 척박해 보이고, 고립되어 보이고, 야생의 날 것처럼 보이는 대자연의 그곳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먼 여행길에서 마주한 한사람, 한사람이 전부 인연으로 느껴지고 소중한 만남이 되었던 것처럼 언택트를 맞은 이 시대에 이 글을 통해 여행을 같이 했으니 우리 또한 소중한 인연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찾아온 것 또한 그대들의 삶의 여정의 일부이니 이 글로 잠시나마 즐거웠다면 이 시대를 그저 원망하며 보내기보다는 여행하듯 보내길 바라본다.

     

     

     

     

     

     

  • 류명화 글쓴이 : 류명화 1972년 청명한 식목일 오후 2남7녀 중 아들이길 바랐던 부모님의 서운한 마음과 상관없이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똑똑하진 않지만 나름 삶을 즐길 줄 알고 퉁퉁한 아랫배와 홀쭉한 주머니 사정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 건강한 여성이다. 지금은 봉화의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바탕으로 숲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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