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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마을 최고의결기구, 노반회가 펼치는 마을 축제
    남효선 | 2009-08-31 프린트 퍼가기
  • 말복 추렴...불가서 섶 솥 걸고 더위 식혀
    마을 최고의결기구, 노반회가 펼치는 마을 축제

                                         

    지난 13일은 말복이었습니다. 한 주 전에 이미 가을이 들어선다는 입추가 지나갔지요. 절기는 가을인데 계절은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입니다. 그러나 올 동해연안 사람들의 심기는 그닥 유쾌하지 못합니다. 여름 내내 저온현상으로 햇볕 한 줌 제대로 들 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자연 기온이 낮고 사흘 걸러 비가 내리는 이상 기온으로 애써 가꿔 놓은 작물들이 도무지 이삭을 맺지 못하고, 혹 열매를 맺어도 속이 여물지 않아 농심을 바짝 태웁니다.

     

    ▲ 노반회는 전통사회의 마을 내 최고 의결기구로서 60세 이상의 바깥 노인(남성)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복날인 말복날 아침, 울진 북면 새마 마을부녀자들의 발걸음이 바빠졌습니다. 오늘은 마을 노인분들을 모시고 ‘추렴’을 하는 날입니다. ‘복다림’이지요. 전통사회의 마을 자치 조직 중에서 최 정점에 있는 모임이 ‘노반회(老班會)’입니다. 울진 지방에서 이를 ‘노반회, 노반계, 노회’ 따위로 불렀습니다. 마을의 60세 이상 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치조직입니다. 4~50년 전까지 노반회는 마을 자치조직 중에 최고 권위 있는 조직으로서 마을의 크고 작은 공적인 일의 논의와 결정은 모두 노반회에서 결정할 만큼, 노반회는 마을의 최고 의결기구였습니다. 현재도 이들의 성격은 많이 약화됐지만, 여전히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은 노반회에서 최종 결정합니다.

      

    새마 마을의 노반회는 80여 년 전에 구성됐습니다. 지금도 설립 당시의 강령과 규칙, 구성원을 담은 ‘노반회 문서’가 마을회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노반회는 해마다 정월 보름 마을 성황고사를 치룬 뒤, 마을 총회를 열고 이어서 노반회 회의를 합니다. 마을총회에서 결정된 의사를 노반회에 보고, 최종 승인을 받는 셈입니다.

     

    ▲ 울진군 북면 새마 마을의 노반회 문서

      

    노반회는 정월 보름 정기적 모임 외에 봄철과 늦여름 무렵에 ‘추렴(천렵)’을 갖습니다. 봄철의 추렴은 일종의 화전놀이며 늦여름의 추렴은 ‘복다림’의 성격이 강합니다. 노반회의 수장은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어른인 ‘동수’가 맡습니다. 선출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가장 많으신 어른이 자동적으로 수장을 맡는, 이른바 당연직입니다. 재임 중에 사망하면 다음 연장자가 수장을 맡습니다. 또 노반회의 일을 맡는 ‘유사’는 2인이며, 이 중에서 연장자가 ‘상유사’ 직을 맡습니다. 유사는 매년 회원들 간에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새마 마을의 노반회는 논 세 마지기 규모의 공동자산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반회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합니다. 또 정월 보름 노반회 회의를 마치고 풍물을 울리며 지신밟기와 걸립을 해서 비용을 만들어 모임을 꾸려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농과 고령화로 풍물이나 걸립이 거의 사라져 봄철과 여름철의 추렴에 드는 비용은 마을 부녀회의 기금으로 충당합니다.

     

    올해의 추렴 장소는 ‘흥부다리 밑’입니다. 30여 년 전까지는 해마다 ‘퇴내 불가(백사장)’에서 추렴을 하고 배를 타고 푸른 동해 바다를 유람하기도 했으나, 퇴내마을이 원자력발전소 부지로 편입되면서 추렴장소도 자연스레 없어졌습니다. 고운 바닷모래가 10리나 펼쳐지고 붉은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던, 명사십리로 불리던 퇴내불가가 사라지자 무더위를 식히며 한바탕 신명판을 펼치던 추렴판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른들은 30여 년 전 퇴내불가에서 솥을 걸고 끓여 먹던 ‘섶(홍합) 느리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주먹만한 섶을 부추와 함께 한 솥 가득 넣고 끓여 낸 뽀오얀 빛깔의 ‘섶 느리미 국’은 단숨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는 ‘한 여름의 보양식’이자 별식이었습니다. 장소는 비록 다르지만 여전히 ‘추렴판’의 복다림 음식은 ‘섶 느리미 국’입니다. 마을 부녀회는 이미 추렴 날이 잡히자 흥부 앞 바다로 달려 나가 섶을 캤습니다. 여기에 술안주로 삶은 돼지고기가 놓였습니다. 부녀자들이 섶 느리미를 끓이는 동안 성숙이 할아버지와 노반회에서 젊은 축에 드는 어른들 서넛은 ‘반대’를 들고 흥부 거랑으로 내달아, ‘은어와 꺽지, 퉁가리’ 잡이에 나섭니다.

     

    꺽지와 쪽바우는 바위 밑으로 숨어드는 성질이 있어, 커다란 망치로 바위를 두들기면 ‘깡깡’ 소리와 함께 꺽지와 쪽바우가 물 위로 배를 뒤집으며 떠오릅니다. 어른들은 “귀가 멀어 죽는다”고 여깁니다. 은어는 고욤(감 보다 작고 맛이 떫은 고욤나무의 열매)을 이용해서 잡습니다. 고욤을 가득 따서 감과 모래를 섞어 디딜방아로 찧습니다. 이때 나오는 액을 자루주머니에 넣어 은어가 다니는 ‘거랑’에 흔들어 풀면 은어는 맥도 못 춘 채 물 위로 떠오릅니다. 온통 거랑은 은어가 풍기는 ‘수박 냄새’로 가득 찹니다. 은어가 일품인 것은 역시 은어가 풍기는 수박향입니다. 

     

     ▲ 울진지역의 노반회는 ‘노회’, ‘노반계’ 따위로 불렸으며 매년 정월 보름 마을 성황제를 지낸 뒤 마을 총회에 이어
       정기회의를 가지며 서숙밭 세벌매기가 끝나는 무렵과 복날이 끼이는 늦여름에 ‘추렴’을 갖고 신명판을 펼친다.

      

    고욤나무 열매로 잡는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는 ‘쟁피나무 잎과 껍질’을 이용하는 방식도 즐겨 씁니다. 마을 앞산에 지천으로 자라는 쟁피나무의 잎과 껍질을 잘 말린 뒤 디딜방아로 찧어 가루를 체로 걸러냅니다. 쟁피가루를 포대에 넣어 은어가 오는 길목에 풀어 놓으면 은어, 퉁가리, 돌고기들이 독한 쟁피가루 냄새에 질식해 물 위로 허연 배를 뒤집고 떠오릅니다.

     

    또 은어는 ‘도부사리’라는 방식으로 잡기도 합니다. 성숙 어른의 도부사리 솜씨는 일품입니다. 도부사리는 일종의 낚시법으로 큰 은어를 잡을 때 쓰는 방식입니다. 미끼는 새끼 은어를 사용합니다. 새끼 은어를 잡아 낚시 줄을 은어의 코에 꿰고 은어 배에 두 서넛의 낚시 바늘을 단 뒤, 은어가 몰려다니는 곳에 풀어 놓습니다. 그러면 은어 떼가 미끼로 사용된 은어를 쫒기 위해 미끼 은어의 배를 툭툭 치다가 낚시 바늘에 걸려듭니다. 은어는 무리로 이동하면서 은어임에도 같은 무리가 아니면 배 밑을 공격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영역 지키기인 셈이지요. 도부사리는 오랫동안 은어들 곁에서 생활해 온 마을 노인들이 은어의 습성을 이용해 잡는, 일종의 생태어법인 셈입니다.

     

    주기와 함께 흥이 오르자 한바탕 메구판이 벌어졌습니다. 해가 땀방울을 거두며 서쪽 매봉산 기슭으로 느릿느릿 기울면 노반회의 복다림 잔치인, 추렴도 거의 끝이 납니다. 얼콰한 주기로 새마 마을 어른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 옵니다. 다음 날부터는 집집마다 고추따기에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 남효선 글쓴이 : 남효선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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