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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장영_종가이야기]학봉종택(鶴峯宗宅)
    컬처라인 | 2023-07-11 프린트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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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이야기

     

    학봉종택

    鶴峯宗宅

     

    글. 박장영

     

      

    ❙ 종택이 있는 곳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과 그의 종손들이 살아온 종가이다. 안동역에서 924번 지방도를 따라 봉정사 가는 길로 5km 정도 들어가면 서후면 우측 도로변에 위치하며, 1995년 12월 1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 112호로 지정되었다. 

     

     

    ❙ 당호의 유래

    학봉종택의 당호인 풍뢰헌(風雷軒)은 종택 안에 있는 별당 건물이다. 학봉의 장손인 김시추(金是樞, 1580~1640)의 호는 단곡(端谷), 풍뢰헌이다. 풍뢰는 주역에 나오는 익괘(益卦)의 괘상(卦象)으로서 “바람이 세차면 우뢰도 빠르고 우뢰가 거세면 바람도 억세다.”는 풍과 뢰의 상보상성(相補相成)에 따라 인세(人世)의 천선과 개과에 있어서도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성인의 뜻에서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호를 따라 집의 편액을 풍뢰헌이라 하고 서실에는 “분함을 징계함에는 산을 까는 듯이 하고 욕심을 막는 데는 구령을 메우듯이 한다(懲忿如摧山 窒懲如填壑).”라는 좌우명을 붙여 스스로를 가다듬고 후진을 깨우쳐 인심과 풍속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이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고 하여 학봉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1762년 이곳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종택을 신축하여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에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였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은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였다.

     

     

     

     

     

    학봉종택은 巳자형의 정침·풍뢰헌·사당·문간채와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던 운장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택 외부에는 학봉기념관이 있다. 풍뢰헌은 문간채와 마주하는 위치에 지난 1990년 중건한 별당형 정자이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그 좌우에 각기 1칸의 온돌방을 배열하였고 앞쪽에 툇마루를 내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다. 기단의 형식은 다듬돌 바른층쌓기로 마감한 후 다듬돌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건물 앞쪽에는 원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건물의 정면에 툇마루와 좌우 측면 쪽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고 뒷벽에는 바라지창을 내어 무더운 여름에는 개방하여 시원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장은 서까래와 도리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대청의 정면에는 사분합문을 달아 필요시 개방하여 들어 올릴 수 있는 구조를 취했다.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방은 1칸 반 규모이고 하인방에 머름을 올리고 궁판이 있는 세살문의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방으로 출입은 대청과 방을 구분 짓는 벽에 사분합문을 내고 이곳으로 출입하도록 하였다.

     

     

     

    건물의 앞 도리에 ‘풍뢰헌’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에는 풍뢰헌 김시추가 평소 좌우명으로 삼은 『懲忿如摧山 窒懲如填壑』라는 주련이 걸려있다. 정침은 口자형의 평면을 갖추었으나 30년 전에 정침의 좌측에 아래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인 평면은 巳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정침의 우측에 돌출하여 자리 잡고 있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문충고가(文忠古家)’ 편액이 걸려있다. 자연석을 다듬어 높은 기단을 쌓고 자연석 주초를 놓고 앞쪽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정면에서 보아 좌측 2칸은 사랑방이고 우측 2칸은 대청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과 대청의 앞쪽에 툇마루를 깔았다. 사랑방은 2칸 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의 손님이 방바닥을 잘 볼 수 없도록 머름중방을 설치하고 창을 냈다. 방문은 세살문의 쌍여닫이문과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다. 우측 2칸은 사랑마루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고 앞에는 궁판이 있는 세살문의 사분합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마루의 좌측면은 판벽과 널판문, 바라지창을 내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사랑채의 뒷면과 정침의 우측면까지 좁은 쪽마루를 깔고 난간을 설치하여 연결되도록 하였다.

     

     

    중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6칸 규모의 안채를 마주하는데, 좌측부터 1칸의 부엌, 2칸의 안방, 3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방과 찬방이 배치되어 있고 부엌과 연결되어 있다. 찬방과 부엌 사이에 널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을 통하여 아래채로 들어갈 수 있다. 아래채는 홑처마 맞배지붕집으로 규모는 5칸 크기이고 창고와 화장실로 이용한다.

     

     

    사당은 정침의 동북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출입문은 외문이다.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면 3칸에 각각 문을 달았는데 어칸은 쌍여닫이문이고 좌우 협칸은 외문이다. 내부에는 벽감실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교의·제상·향상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에는 불천위인 학봉과 배위인 정부인 권씨의 신주를 비롯하여 4대 봉사 조상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 관련인물

    1)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 19년인 1564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선조 1년인 1568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 등을 거쳤다. 그 후 부수찬·정언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를 한 뒤, 157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했다. 그 후 함경도 순무어사·사간·황해도 순무어사를 지냈으며, 나주 목사로 있을 때는 대곡서원을 세워 김굉필·조광조·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가 되어 정사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때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했으나, 동인인 그는 일본의 침략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당시의 동인정권은 그의 견해를 채택했다. 1592년 형조 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동인인 류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학봉은 학문적으로 이황의 학설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학통은 장흥효, 이현일, 이재, 이상정으로 이어졌다. 현종 5년인 1664년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안동의 호계서원·사빈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 상례고증(喪禮考證)·해사록(海傞錄)·학봉집(鶴峰集) 등이 있다.

     

     

    2) 김시추(金是樞, 1580~1640)

    김시추의 자는 자첨이고 호는 단곡·풍뢰헌이며, 본관은 의성이다. 김집의 아들이며 학봉의 장손이다. 약관의 나이에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선조 34년인 160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인조 2년인 1624년 안기도 찰방에 부임하였고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며, 1630년에 의금부 경력에, 1636년 병자호란에는 유진장으로 활약했다.

     

    김시추는 당대의 실세 권력자인 이이첨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내용의 '영남만인소(萬人疏)'(1621)의 소수(疏首)가 되었다. 소수는 만명이 올린 상소문의 제일 앞에 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차하면 제일 먼저 죽어야 하는 역할이 '소수'이다.

     

     

    ❙ 전하는 이야기

    1) 유년시대의 일화

    학봉 선생은 6세에 이미 효경을 배웠다 하며, 이 때 여러 벗과 놀다가 한 아이가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니 다른 벗은 모두 달아났는데 학봉은 내려가서 다친 벗의 용태를 살피고 집에 알려 그 아이의 목숨을 구했다.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옛날 사마온 공이 물독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자 독을 깨고 구출한 ‘격옹의 고사’에 견주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벌거숭이 소년들이 멱을 감고 있는데 그때 마침 새로 부임하는 사또의 행차가 있어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개구쟁이 소년들은 사또가 오는 길목 언덕에 올라가 행차가 아래에 당도하니 신관의 가마에다 오줌을 쌌다. 행차는 떠들썩해지고, 이에 부임한 사또는 행차를 멈추고 오줌 누는 소년을 불렀는데 소년은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하였다. 기가 막힌 신관 사또는 개구쟁이 소년이 귀여워서 벌로 글짓기를 시켰다.

    소년에게 글귀를 주니 서슴없이『군하선달아하지(君何先達我何遲). 추국춘란각유시(秋菊春蘭各有時). 막도금일송저탑(莫道今日松低榻). 송장타일탑반저(松長他日榻反低)』라고 시를 지었다.

     

    “사또 어찌 먼저 벼슬했고, 나는 왜 늦었을까?

    가을 국화, 봄 난초가 각기 때가 있다오,

    중인은 저 솔이 낮다고 탑이 높다 웃지 마소.

    솔이 자란 그날엔 탑이 도리어 낮아진 다오.”

     

    시를 보고 놀란 신관 사또는 귀여운 개구쟁이 머리를 쓰다듬은 후, 부형 청계 공을 찾아 인사하고는 감탄하며 떠났다고 한다.

     

    하루는 선조가 경연에서 “경들은 나를 옛날 제왕에 비교하면 어떤 임금에 견주겠는가?” 하니, 모두 “요순 같으신 성군이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학봉은 “전하는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 같은 폭군도 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얼굴을 붉히고는 “요순과 걸주가 어떻게 같은가?” 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생각을 깊이 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이 그르면 미친 사람이 된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천자가 고명하여 요순이 되기 어렵지 않으나 다만 스스로 어질게만 여기고 간하는 말씀을 반대하니, 간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닙니까?”라고 아뢰자, 임금은 낯빛이 변하면서 자세를 고치자 경연 자리에 있던 모두가 벌벌 떨었다. 

     

    이에 서애 류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요순으로 끌어들이려는 말씀이요. 걸주로 비유함은 경계하는 말씀이오니 어느 말이나 모두 임금을 사랑하여 아뢴 말씀입니다.” 하였더니 그제야 임금의 낯빛이 밝아지고 술을 내릴 것을 명하고 파하였다.

     

    2) 특별한 제사음식

    학봉 불천위 제사상에는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차리는 특별한 제사 음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산마이다. 약과 위에 올리는데, 익혀서 쓴다. 그리고 또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사용한 송기 송편과 소금장도 제물로 오른다. 이 제사음식은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의 전쟁터 곳곳에서 민생을 돌보며 진두지휘하는 절도사와 관찰사, 초유사 등의 직분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수행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초와 관련이 있다.

     

     

     

  • 박장영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전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콘텐츠연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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