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 블로그

CL포커스

문화메신저

  • 강병두
  • 김범선
  • 남시언
  • 남효선
  • 박장영
  • 백소애
  • 안경애
  • 안종화
  • 엄의식
  • 이미홍
  • 전미경
  • 정창식
  • 황구하
  • 컬처라인

지난연재

  • 김종우
  • 고성환(高性煥)
  • 권혁만
  • 김만동
  • 김상진
  • 김상현
  • 김현주
  • 남정순
  • 류명화
  • 류준화
  • 박원양
  • 박월수
  • 송성일
  • 안상학
  • 엄순정
  • 엄원식
  • 오공환
  • 유경상
  • 유태근
  • 이선아
  • 이종암
  • 이효걸
  • 임은혜
  • 장호철
  • 최혜란
  • 편해문
  • 허지은
  • 혼다 히사시(本多寿)

문화포커스

>CL포커스>문화포커스

  • 게시판 상단
    [엄의식_봉화 마을길 걷기]짙은 여운이 남는 인문학 산책길
    컬처라인 | 2023-10-04 프린트 퍼가기
  •  

     

    마을이 있는 풍경

    봉화 마을길 걷기

     

     

    짙은 여운이 남는 인문학 산책길

     

     

    글, 사진 엄의식

     

      

     

     

    법전면 법전마을 이오당 – 음짓마(음지마을, 음촌(陰村)) – 양지마(양지마을, 양촌(陽村)) – 법계서실 – 척곡교회 – 사미정 - 조래마을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과 사고,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표현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고작 마을길을 걷는 것뿐인데 ‘인문학’이라는 너무 거창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법전면 면사무소와 이웃한 이오당에서 진주 강씨 법전문중의 세거지인 음짓마, 양짓마를 거쳐 척곡리의 척곡교회, 그리고 사미정(四未亭)에서 조래마을에 이르는 9.5km의 지방도를 걷는 마을길은 ‘인문학 산책길’이라 부를만하다. 

     

     

    이오당(二吾堂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인문학 산책길’다운 ‘두개의 나’로 시작하는 마을길 이다. 이오당(二吾堂)이란 이름은 ‘낙오천(樂吾天), 종오년(終吾年)’에 두 개의 오(吾)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 뜻은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받은 나와 내가 선택하는 나가 있다. 하늘이 내린 천명을 감사히 받아 올바르고 성실하게 자신의 생을 살면 사람을 내린 하늘의 뜻에 부합한다.’는 정신을 담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입향조인 잠은(潛隱) 강흡(姜洽, 1602~1671)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사후 8년 뒤인 1679년 건립되었다.

     

     

     

    법전마을

    법전천을 사이에 둔 법전리 음짓마와 척곡리 양짓마는 진주 강씨 법전문중의 세거지이다. 보기에는 한 동네이지만 법전천을 기준으로 법전리와 척곡리로 나누어지는데 예전에는 안동부와 순흥부의 경계이기도 했다고 한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柳谿)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잠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1636년 입향한 잠은(潛隱) 강흡(姜洽, 1602~1671)과 도은(陶隱) 강각 (姜恪, 1620-1657)형제 또한 도잠 도연명의 ‘도(陶)와 잠(潛)’를 따서 자호하고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짓마 13명, 양짓마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출처 :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세거지는 법계천을 따라 내려오며 우측지역에 형 강흡의 사당인 이오당이 있고, 그 옆으로 경체정과 기헌고택 등이 음지마을을 이룬다. 다리를 건너면 동생인 도은 강각의 도은구택과 해은 강필효의 해은구택이 있는 양지마을이 있다. 특이하게 음짓마에는 송월재 이시선이 380여 년 전 법전면 풍정리에 지었던 송월재종택이 고종27년 그의 7대손인 이하필이 지금의 이곳으로 이전하여 터를 잡고 있기도 하다. 또한 법전강씨의 종택은 양짓마의 도은구택인데, 이는 음짓마 이오당 근처에 있던 잠은 강흡의 잠은종택이 민속촌으로 이전되며 종택은 원래 세거지였던 파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도은구택이 ‘법전강씨종택’이 되었다고 한다.

     

     

    진주 강씨 법전문중에 대한 나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1.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은 대.소과 합격자를 배출한 문중이다.

     

    2. 조선의 붕당정치 하에서 음짓마는 노론으로, 양짓마는 소론으로 나뉘었고 양짓마의 해은 강필효는 소론의 정맥이라 불리운다. 이는 동생인 도은 강각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므로 그 자손이 외가인 윤증에게 사사하게 되었는데 같은 서인이었던 송시열과 그 제자였던 윤증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며 생긴 일이다. 논산이 세거지였던 스승 윤증은 소론의 영수였으며, 그에게 사사한 까닭으로 형제지간이 같은 마을에 있는 형의 집안인 노론과 대척점을 유지한 것이 놀랍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대립관계가 원동력이 되어 경쟁적으로 비등한 대과급제자를 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법전천을 따라 걷노라니 공부 마치고 불을 끄려다 건너 마을의 환한 불빛을 보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광경이 그려져 긴장감이 느껴진다. 물론 나였다면 자발적이 아니고 타의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법전면은 봉화의 어느 마을 보다 단합이 잘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적으로 치열한 경쟁, 그러나 외부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진주 강씨 법전문중(버제이 강씨)  문중지와 웹사이트는 아주 잔잔하고 고요하다. 이러한 경쟁과 단합의 균형 감각이 거의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이 경이로운 일이다. 이에 대해 강씨 문중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체통을 중히 여기는 가정교육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재벌가의 재산 싸움이 드물지 않은 이 시대에 아주 힘든 일이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4. 고 건축물의 유지와 관리는 기본적으로 소유주와 문중의 책임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손 볼 곳은 많아지는데 수리를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경비가 만만찮다. 법전마을은 지난 몇 년간 지자체 및 정부와 문중의 노력으로 보수가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정부 차원의 좀 더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할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귀한 건축물들을 실물이 아닌 사진으로만 만나게 될 수도 있다.

     

    5. 자손의 번창이 곧 가문의 힘이다. 자체 내에서 대를 이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자손이 귀해지면 양자를 들일 수밖에 없다. 양자의 양자 또 그의 양자로 이어진다면 그 가문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 곳 구택 중의 한 곳은 외부인에게 팔린 것을 다시 문중에서 환매 한 곳도 있다고 한다. 유지를 위한 경비도 경비지만 애정을 갖고 관리를 할 수 있는 이에게 문중의 보물들이 맡겨질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경체정

    1858년 건립되어 자그마한 동산과 노거수와 함께하는 경체정의 아름다운 모습은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잡는다. 시선에 이끌려 첫 행보에서 마주친 추사 김정희의 현판은 경체정의 단아한 모습과 아주 잘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더불어 같이 있는 현판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글씨라고 한다. 

     

     

     

    기헌고택

    기헌 고택은 1845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기헌(起軒) 강두환(姜斗煥, 1781~1854)은 헌종의 스승이었다.

    “한양의 정승 판서들이 사는 저택의 대문은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 거리지 않을 정도라 하였다. 그러나 기헌 고택의 대문은 한양의 정승 판서들부터 충신열사 석학대덕 등은 물론 초동목부에서 원근의 걸인들까지 즐겨 드나들며 저잣거리를 방불케 하였다고 한다. 지난날 이웃에 음덕을 베풀던 적선지가(積善之家)의 옛 모습에서 법전 마을의 선비정신이 무엇인가를 현대인들에게 생각하게 하고 있다. (출처 : 진주 강씨 법전 문중)”

     

    적선지가의 전통이 아직까지 이어져 종부께서 길손인 내게도 안채로 초청하여 차를 내주셨고, 종손은 근처 급제공원을 안내까지 해주셨다. 그에 의하면 노론, 소론, 남인 등은 정치적인 입장뿐만 아니라 가옥의 형태까지 다르다고 하셨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져야 같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가는 말이다. 기헌고택 앞의 상소문 비석은 강직한 기헌 강두환 공의 기상이 잘 나타나있는 상소문이다. 그런 상소를 받고 스승이라 용서해준 헌종의 배포도 칭송받을 만하다.

     

     

     

     

    해은구택

    1750년경 건립된 곳으로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 1764-1848)의 호를 따서 해은구택이라 한다. 해은의 해은문집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해은집』과 『농노집』의 목판이 법계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소론의 학맥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은 『대명산구곡』은 대명의리(大明義理) 앞세워 주자의 『무이구곡가』처럼 봉화 명호면에서 안동 도산면 농암종택까지 낙동강 상류 아홉구비 물줄기에 대해 논한 것이다. 처음 대명산구곡을 대했을 때는 사대사상을 생각했는데, 입향조의 입장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생각해보면 다른 입장이 된다. 명이냐 청이냐로 나뉘어져 고민하였던 선조들처럼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작금 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니 서글프다.

     

     

     

    법계서실

    1840년(헌종6) 해은 말년에 제자들이 주동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는 법계서실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얹히듯 자리 잡은 모습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특이하게 외부에 튀어 나온 금속제 받침 혹은 연결구의 모습은 아마도 이곳에 보관된 『해은집』과 『농노집』의 목판 보관을 위한 강력한 선반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척곡교회

    법계서실을 뒤로하고 사미정로를 따라 내려가다 건문골길로 우회전하여 약 700m를 가면 척곡교회가 나온다. 1907년 이 궁벽한 시골에 대한제국 탁지부를 지낸 김종숙이 세운 교회이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종숙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야소교(예수교의 음역어)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가족들을 데리고 처가가 있던 봉화군으로 낙향해 전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낙향 초기에는 30리 떨어진 상운면 문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지만 이내 척곡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도실을 세웠고, 이것을 교회로 발전시켰다. 이어 ‘명동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김종숙 목사(설립후 목사 안수 받음)는 1926년 교단 목사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적발돼 모진 고초를 당했다. 광복 직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민족의 구원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척곡교회는 2010년대 초반부터 목사 없이  창립자 김종숙 목사의 손자인 김영성 장로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가 2020년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였고, 2022년에는 창립115주년 기념책자까지 발간되었다. 초창기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척곡교회는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 257호로 지정되었다.

     

    'ㄱ자형' 내지 '一자형'으로 지어진 초대 교회들과는 달리 9칸 규모의 국내 유일의 'ㅁ자형' 기와집 예배당으로 지어져 초기 기독교 건축물로서의 연구적 가치가 높다. 또한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초기 교적부를 통해 당시 이 지역 기독교의 역사적 자취를 살펴볼 수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교회의 문서들은 ‘청량산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8년 방문 당시 김영성 장로님

     

    2018년에 마을길걷기 회원들과 방문하였을 때 만난 김영성 장로님은 당시 연세가 94세이셨는데 아주 정정하셨다. 인근 춘야초등학교의 교가를 작사·작곡하신 것 외에도 여러 곡을 만든 작곡가이며 교장으로 퇴임하신 분이다. 우리를 교회로 안내하여 간단한 설명을 해주셨고, 장로님의 제안으로 그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돌아오지 않는 독립군 오빠를 생각하는 ‘오빠생각’과 김정구 선생이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기억이 있다. 교회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를 부른 것은 처음이나 ’독립군‘이라는 주제라 가능했을 것이다.

     

    그 옛날에 이 산골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위한 일을 도모한 김종숙 목사님과 연로하셨지만 열성적으로 교회를 관리하는 김영성 장로님께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예전에는 맡은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맡은 일을 이용해서 자신을 살찌우려는 것이 다반사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면 좋겠다. 유튜브에서 2022년 척곡교회 115주년 기념식을 볼 수 있었는데 장로님은 여전히 정정하셨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건강하시기를 바라본다.

     

     

    척곡교회 옛모습

     

     

    사진에 아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봉화가 12만 인구 시절이었던 1970년 이전으로 보인다. 신생아 합계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진 지금, 아주 부러운 풍경이다.

     

    척곡교회을 나와 사미정과 옥계정을 가는 길에서는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 1778~1864)의 ‘춘양구곡’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미정과 옥계정은 이한응이 운곡천 9㎞에 걸쳐 설정하고 경영한 춘양구곡의 2곡과 3곡에 등장하는데 경암은 어은(漁隱)에서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정하고 “삼가 무이도가 운에 차운해 각각 한 장을 짓고, 장난삼아 여러 명사에게 주어서 서로 화운하게 하여 춘양의 산수고사(山水故事)를 삼는다.”며 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짓는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미정

    교회를 나와 다시 소천2리 어은동을 지나면 1727년(영조3년) 옥천(玉川) 조덕린 (趙德鄰, 1658-1737)이 말년을 위해 지은 사미정이 운곡천을 굽어보고 있다. 조덕린이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사미정’이라고 붙인 이유가 재미있다. 이런 내용은 그가 지은 『사미당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1725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거세져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소를 올리자 영조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조덕린은 이때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미정을 지을 것을 계획했다.

    “내가 종성에 유배된 지 3년, 그해가 정미가 되고 그해 6월이 정미가 되고 그달 22일이 정미가 되고 그날 미시가 또 정미가 되었다. 이런 날을 만나면 무릇 경영하는 자는 꺼리지 않았고, 음양가는 이런 날을 존중해 만나기 어렵다고 여겼다. 내가 이때 중용을 읽다가 공자의 말씀에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仁 義 智 勇)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데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여 ‘성인은 인륜이 지극한데도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 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한가’라고 토로했다. 마침 이런 일시를 만나 한 움집을 지어서 살려고 생각하며 ‘사미’라고 이름 지었다.”

    조덕린의 ‘사미정기’ 내용이다. 조덕린의 이런 정신은 후세에 이어지고, 사미정은 영남사림의 공부 장소가 되었다. 정자 처마에 걸린 현판 ‘사미정(四未亭)’과 정자 안 현판 ‘마암(磨巖)’의 글씨는 번암(礬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친필이라고 한다.

     

    춘양구곡 中 2곡 

    二曲玉川川上峰  이곡이라 옥천 시냇가 산봉우리 

    幽軒相對若爲容  그윽한 초당에서 마주하니 사람 얼굴 같네  

    磨而不沏盤陀面  갈아도 닳지 않는 너럭바위 위로는  

    千古光明月色重  천고에 빛나는 밝은 달빛이 비치네

     

    이한응은 사미정 굽이에서 정자 주인공인 조덕린을 그린다. 옥천은 조덕린의 호이면서 운곡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윽한 초당 즉 유헌(幽軒)은 사미정을 말한다. 산봉우리는 조덕린 모습 같고, 너럭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조덕린의 덕은 밝은 달빛처럼 영원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몇 년 전 들렀을 때는 계곡 가에 음식점이 영업을 하여 바로 밑에까지 접근이 가능하였으나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접근 또한 쉽지 않다. 문득 “옛날에는 돈이 있다고 아무나 정자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법전, 마을과 사람들, 은둔과 현자의 땅』 저자인 강필구씨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당시에 정자를 짓기 위해서는 돈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주위 세력자들의 동의가 필요했었다. 지을 때도 여러 가지 능력이 있어야 했지만 오늘 날에는 지어진 정자를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미정이 담으로 둘러싸여 운곡천을 바라보고 있어 방문객은 그 뒷모습과 운곡천의 일부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접근이 쉽지 않다고 투덜거릴 일은 아니다.

     

     

    사미정과 사미정 가는 길에 보이는 운곡천

     

     

    옥계정(졸천정사) / 옥계종택

    사미정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계정은 옥계(玉溪) 김명흠(金命欽, 1696〜1773)의 효행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로 졸천정사(拙川精舍)라고도 하는데, 옥계(운곡천)를 달리 졸천(조내, 조래)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이다. 김명흠은 사미정을 지은 조덕린 문하에 13세 때 들어가 학문을 배운 제자이다. 그는 조덕린이 유배됐을 때 스승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스승이 유배 중 세상을 뜬 뒤에도 스승의 자식들을 극진히 돌봤다고 한다. 춘양구곡의 둘째 굽이와 셋째 굽이로 이어진 스승과 제자의 정이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

     

    제3곡. 풍대(風臺)

    三曲風臺架若船  삼곡이라 풍대에는 정자가 배와 같구나

    冷然神御枉何年  썰렁한 사당은 몇 년 동안이나 폐해졌나

    波流不盡巖阿古  시내는 마르지 않고 바위 언덕 오래인데

    啼鳥落花摠可憐  우는 새와 떨어지는 꽃잎이 모두 가련하네

     

    어풍대라 불리는 냇가의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는 마치 배처럼 보였다. 이한응은 마르지 않는 운곡천 물결이 거세게 부딪쳐도 풍대 바위는 끄떡없는데, 생명을 가진 새와 꽃은 영원하지 않으니 가련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이는 인생의 유한함에서 오는 허무함을 비유한다. 

     

     

    옥계정

    옥계종택

     

    조래마을을 지나 운곡천의 다리를 건너면 안동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만나는데 10km가 좀 안 되는 짧은 여정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길은 지난 400년간 경쟁과 협력의 균형추를 놓치지 않는 문중의 이야기, 400년 전 청이냐 명이냐를 고민하듯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살 길을 찾으려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 강력한 의지로 자신의 자리에서 나라의 미래를 위해 투쟁했던 척곡교회, 그리고 살벌한 붕당정치의 여파로 몇 번의 유배와 그 길에서 맞이했던 자신의 죽음보다 도리어 스스로의 부덕을 탓했던 학자와 그런 스승의 가족 생계를 보살핀 의리 있는 학자들의 이야기 등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주제로 가득 차 있는 멋진 ‘인문학 산책길’ 이다.

     

     

     

     

     

     

  • 엄의식 글쓴이 : 엄의식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졸업하고 33년간 직장생활 후에 사과농사를 종신직업으로 선택하였다.
    2014년부터 봉화군에서 "봉화 즐거운 사과밭"의 주인이다.
 
코멘트 영역
글에 대한 코멘트